낯선 행성-어제보다 더 나은 단어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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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키예프’가 ‘키이우’가 됐다. 지난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결국 비극이 찾아왔다. 얼마 후 삼일절. 우크라이나 대사관은 한국에서 쓰는 우크라이나의 지명 표기가 러시아식이며 이것이 우크라이나인들에게는 매우 가슴 아픈 일이라고 했다. 언론과 여론은 곧바로 그들의 요청에 응했다. 우리 역시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있기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독도를 다케시마로 표기하는 해외언론에 화를 냈고, 일제강점기의 일본어 잔재를 없애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대한민국은 그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대부분의 매체는 곧바로 이 같은 표기를 바로 잡는다고 발표했고, 지난 3월 14일 국립국어원은 심의를 거쳐 우크라이나 지명의 한글 표기를 확정했다. 마침내 키예프로 표기하던 우크라이나의 수도는 키이우라는 제 이름을 되찾았다.

네이선 W 파일의 <낯선 행성> 한 장면 / 시공사

네이선 W 파일의 <낯선 행성> 한 장면 / 시공사

무심코 사용하는 단어 하나에도 역사와 고민이 있다. 우리가 평소에 어떤 단어를 쓰느냐가 시선과 생각을 투영하기도 한다. 인터넷에 혼란스럽게 펼쳐진 댓글에는 ‘멸칭’이 가득하고, 일상의 언어에도 오래 묵은 편견이 그대로 묻어 있다. 온라인이 주요한 발언의 장이 된 지금, 새로운 혐오의 언어도 순식간에 자라난다. 세대와 계층 혹은 자신이 넘나드는 커뮤니티에 따라서 그들만의 은어를 갖고 있어 오해가 쌓이기도 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시작한 비하 표현을 그저 유행어인 줄 알고 썼다가 식겁하는 때도 종종 있었다. 말은 순식간에 뱉을 수 있지만,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그래서 어렵다.

어떤 가치 중립적인 존재가 있다면 과연 어떤 식으로 말을 할까. 힌트가 될 만한 만화가 한편 있다. 작가 네이선 W 파일이 소셜 미디어에 발표한 작품 <낯선 행성>은 외계인이 지구인의 일상을 경험하며 겪는 순간을 담았다. 여기서 독창적인 건 그들이 낯선 단어들로 소통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부모를 ‘생명증여자’라고 하거나 별을 ‘가스로 된 구체’라고 표현한다. 생일은 누군가가 태어났을 때 이 행성이 있던 위치에 돌아오는 날이고, 수명은 최종 공전 수에 불과하다. 음식은 자양분이며, 이름은 부를 때 쓰는 문자 배열이다. 그들의 대화를 한참 듣다 보면 우리가 쓰는 단어가 실제 대상을 정확히 나타내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물론 문자를 만들던 이집트인들도, 지구의 언어학자들도 이미 비슷한 고민을 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키예프가 키이우가 됐다고 썼다. 쓰고 나니 이 한 문장에도 문제가 많다. 이미 러시아라는 단어만을 명분 삼아 한국에 거주하는 유명 러시아인 유튜버에게 달려가 차마 지면에 옮기지 못할 댓글을 남기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얕은 지식은 다른 표현을 찾아내지 못했다. 잘못 쓰이는 단어 중에는, 그러나 충분히 대체할 수 있는 단어들도 있다. 성차별적 단어인 저출산, 집사람, 유모차, 처녀작 같은 말은 저출생, 배우자, 유아차, 첫 작품 등으로 쉽게 옮겨 적을 수 있다. 항상 완벽한 단어를 찾아낼 수는 없겠지만, 키이우처럼 이렇게 하루아침에 표기를 바꿀 수 있다면 일상에서 어제보다 나은 단어를 쓰는 일 또한 그리 어렵지는 않으리라.

<황순욱 초영세 만화플랫폼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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