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지금·여기라는 해석의 각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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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지옥>은 인간이 벌이는 해석 행위에 대한 우화다.” 물론 이 말부터가 <지옥>이라는 텍스트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지만, 서사를 따라가면 동일한 사태에 대한 해석의 각축이 그려져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만화 <지옥>이든 드라마 <지옥>이든 마찬가지다.

만화 <지옥>의 표지 / 문학동네

만화 <지옥>의 표지 / 문학동네

우선 명명부터가 해석이다. <지옥>에서 사람을 죽이는 미지의 존재 본래 이름은 따로 없다. 도심에서 벌어진 첫 사건 후, 경찰은 이를 “괴물 혹은 괴생물체에 의한 살인”으로 부른다. 하지만 해당 사건에 대해 오래전부터 정보를 수집해온 새진리회와 의장 정진수는 그것을 “지옥의 사자”에 의한 “지옥의 시연”으로 명명한다. ‘살인’이라면 경찰이 해결해야 할 범죄이지만, ‘시연’이라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렇게 새진리회가 부여한 의미는 신의 ‘의도’라는 이름으로 해석의 의미망을 형성한다. ‘시연’을 당해 지옥으로 보내지는 이들은 이런저런 ‘죄’를 지은 ‘죄인’이다. ‘죄인’을 벌하는 ‘시연’을 보여주는 신의 의도는 인간이 보다 ‘정의로워지는’ 것이다. 따옴표 속 말 모두 다시금 해석을 요청하지만, 새진리회의 해석을 받아들인 이들은 모든 세부 역시 새진리회의 해석대로 받아들이고 삶의 지향을 가진다. ‘고지’와 ‘시연’을 당하지 않는 삶. 그 방법 역시 새진리회 교리가 제공한다. 불가지한 일에 대한 모든 해석을 새진리회에 의탁한 사람들의 삶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새진리회에 반대하는 소도 그룹은 다른 해석을 내린다. 미지의 사건들은 해석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들의 해석이다. 의미도 의도도 알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한다. 그러다 ‘고지’와 ‘시연’을 마주하면, 그것을 불행 그대로 겪고 아파하고 죽을 뿐이다. 새진리회의 해석대로라면 모든 시연자는 ‘죄인’이지만, 소도는 그들 모두를 불행을 당한 인간으로 바라본다.

이처럼 해석의 각축을 담은 <지옥>을 “인간이 벌이는 해석 행위에 대한 우화(寓話)”라 한다면, 그것은 누구에게 무엇을 전달하려는 우화인가. 우화는 현실에서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 교훈을 전하는 장르다. 최규석의 2011년작 <지금은 없는 이야기>가 바로 우화집이었는데, 이 작품은 사회를 메시지의 수신처로 상정한 색다른 우화였다. <지옥>은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미지의 사건에 대한 개인의 대응뿐만 아니라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반응까지 담아냈다는 점에서 <지옥>은 ‘개인이 사회적으로 만들어내고 또 허물어내려는 지옥도’란 우화일 수 있다. 인간들의 사회가, 그 구성원이자 독립적 주체로서의 개개인이 함께 교훈의 수신자가 된다.

우화 <지옥>의 사회를 향한 메시지는 명확해진다. 누구도 사회적인 해석의 독점권을 갖게 내버려 두지 말 것. 개인을 향한 메시지는 이렇다. 스스로 해석의 주도권을, 삶의 자율성을 잃지 말 것. 이 두가지가 동시에 가능할 때 ‘지금·여기’라는 해석의 각축장은 보다 살 만한 지옥이 될 것이다. 물론 이조차 다른 누군가의 해석이므로 잘 따져봐야 할 것이다. 다음 사실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순간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돼 있다.” 단테의 <신곡>에 있는 말로 알려졌지만, <신곡>에는 그런 구절이 없다.

<조익상 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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