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은 돌아오는 거야’ 이재용 가석방이 남긴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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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죄확정 총수일가 경영 지속 시 ‘취업제한 규정’ 취지 훼손

“재벌 총수일가는 앞으로 수감되더라도 그 지위만으로 응당 가석방될 수 있다는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건으로 실형을 확정받고 복역해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광복절을 앞두고 8월 13일 오전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가석방되어 나오고 있다. / 권도현 기자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건으로 실형을 확정받고 복역해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광복절을 앞두고 8월 13일 오전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가석방되어 나오고 있다. / 권도현 기자

삼성그룹 지배권 승계 의혹에 대한 형사재판 1심이 진행 중임에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가석방된 것을 두고 시민단체인 경제개혁연대가 내놓은 논평의 일부다. 실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8월 13일 이 부회장의 가석방을 두고 여권 일각과 진보진영에서 반발이 이어지자 “국익을 위한 선택으로 받아들이며 국민께서도 이해해주길 바란다”고 밝히기도 했다. 글로벌 반도체 경쟁이 격화되는데다 코로나19 델타 변이 확산으로 백신 확보에 비상이 걸린 만큼 이 부회장의 ‘역할’을 고려해 가석방을 결정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동안 경제상황을 명분으로 총수일가에 대한 처벌 수위를 낮게 하는 사례는 비일비재했다. 이는 경제개혁연구소의 분석결과에서도 드러난다. 2011년부터 2021년 5월까지 대기업 총수일가가 배임·횡령 등의 혐의로 기소돼 재판이 종결된 11건을 살펴보면, 18명에게 징역형이 확정됐지만 이들 중 절반인 9명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횡령·배임 총수일가 ‘솜방망이’ 처벌

실형을 받은 9명 중 7명은 형이 종료됐지만 형량을 모두 채우고 만기 출소한 경우는 한명도 없었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과 이선애 전 태광산업 이사의 경우처럼 병으로 형집행정지된 사례를 제외하면 대부분 가석방이나 사면으로 풀려났다. 가석방된 이재용 부회장 이외에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최재원 SK 수석부회장이 각각 사면과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은 가석방으로 조기 출소를, 이재현 CJ 회장은 사면을 받았다.

현재 복역 중인 3명 중에서도 이호진 태광산업 회장과 이중근 부영 회장 등 2명은 보석 상태로 재판을 받다 형확정 후에야 재수감됐다. 아직 형이 확정되지 않은 조석래 효성 명예회장은 파기환송 전 1심과 2심에서 모두 실형이 선고됐지만 건강상 문제로 구속되지 않았다.

기소되더라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경우는 드물었다. 사망한 신격호 총괄회장과 이선애 전 이사를 제외한 총수일가 16명 가운데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만 1심 선고 직전인 2012년 8개 계열사 이사직에서 물러났다. 확정판결이 날 때까지 등기임원을 유지한 총수일가도 12명이나 됐다.

등기임원에서 물러나도 미등기임원으로 활동했다.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은 동국제강 대표이사를 사임한 뒤,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전자 사내이사 임기만료 후 각각 미등기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조석래 명예회장은 형사재판과 함께 진행된 증권선물위원 해임권고 취소 소송에서 패한 후에야 효성 대표이사를 사임하고 미등기임원으로 경영에 참여 중이다. 이사회 구성원인 등기이사는 문제가 발생하면 회사와 연대해 손해배상 책임 등이 있지만 미등기임원은 이 같은 책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이다.

유죄가 확정된 이후에도 자리에서 물러난 총수일가는 3명에 불과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확정판결 직후 2014년 2월 7개 계열사에서 퇴직했다. 김승연 회장은 취업제한 기간이 끝난 2021년 4월에 한화, 한화건설, 한화솔루션 등 3개 계열회사에 미등기임원(회장)으로 복귀했다.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도 확정판결 직후인 2020년 8월부터 11월까지 17개 계열회사 이사직을 전부 사임했다. 이중근 회장의 아들 이성한 부영엔터테인먼트 대표도 2020년 9월 사임했다. 이외에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부회장, 이재현 회장은 등기임원에서 미등기임원으로 바뀌는 정도의 변화만 있었다. 유죄가 확정된 총수일가 16명 중 범죄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고 기소나 유죄확정 이후에 일시적으로라도 퇴직한 사례는 4명에 불과한 것이다.

이승희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은 “총수일가 범죄에 대한 집행유예 비율이 높고 유죄판결 이후에도 계속 경영권을 행사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는 현실은 총수일가의 범죄가 빈번히 발생하고 유사한 범죄가 반복되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기업가치를 훼손하는 범죄자는 기업 임원 자격을 법으로 제한하거나 시장에서 퇴출시키는 선진국의 관행과도 대비된다.

유명무실 ‘취업제한 제도’

국내에도 기업가치를 훼손하는 범죄를 저지르면 임원자격을 제한하는 제도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에 있지만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 특경가법 제14조는 5억원 이상의 배임·횡령으로 징역형의 유죄판결을 받은 경우에는 범죄 행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업체에 취업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다만 법무부 장관의 승인을 받은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취업을 허용하고 있다. 그런데 시행령 제10조에서 기업체 범위를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의 공범’이나 ‘범죄행위로 인해 재산상 이득을 취한 제3자’로 제한했다. 단독범행인 경우에는 취업제한이 적용되지 않는 문제가 있어 2019년 ‘유죄판결된 범죄행위로 인해 재산상 손해를 입은 기업체’를 추가했지만 이전까지의 위반 사례에 대해서는 처벌할 수 없다. 이승희 연구위원은 “개정된 시행령을 적용하면 효성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은 효성의 자금을 횡령해 취업할 수 없지만 시행 이전에 벌어진 범죄라서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직 남아 있는 허점도 있다. 법무부는 지난 2월 이재용 부회장 측에 삼성전자 취업제한 대상자라는 사실과 취업승인 신청절차 등을 통보한 상태다. 그럼에도 이재용 부회장은 8월 13일 출소 직후, 서울 서초동 삼성사옥에서 삼성전자 사장들을 만나 경영현안을 보고 받는 등 경영복귀에 시동을 걸었다. 무보수 미등기임원은 ‘취업’이라 볼 수 없다는 논리로 취업제한제도의 빈틈을 파고든 것이다. 앞서 최태원 회장도 사면·복권으로 취업제한 문제가 해소됐지만, 그 전까지 ㈜SK와 SK이노베이션 회장으로 재직해 취업제한 규정 위반 논란이 있었다. 경제개혁연대는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법무부에 취업승인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을 밝혀달라고 요구했지만 법무부는 “별도로 보유·관리하는 지침은 없다”고만 밝혔다.

만약 법무부 장관이 취업을 승인한다면 이재용 부회장은 다시 삼성전자에 취업할 수 있다. 그러나 범죄자의 불법행위로 물의를 일으킨 회사에 상당기간 취업을 제한해 해당 기업체를 보호한다는 특정경제범죄법 취업제한 규정의 취지는 훼손될 수 있다. 이재용 부회장을 두고 또 한 번의 특혜 논란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박상영 경제부 기자 s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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