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폰기 클라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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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이 롯폰기?… 현지화 둘러싼 고민들

“신슌고등학교 3학년 타니카와 레이나는 여신급 미모를 자랑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화장 덕분이다. 그런데 가족 외에는 누구도 모르는 이 비밀을 전학생 칸다 슌에게 들키고 마는데….” 무척 낯익은 줄거리인데 뭔가 이상하다. “대형 요식업체의 회장 부자로 인해 아버지를 잃고 수감 생활까지 해야 했던 미야베 아라타는 출소 후 원양어선을 타며 모은 돈으로 롯폰기에 이자카야를 연다.”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 웹툰 <이태원 클라쓰>의 일본어판인 <롯폰기 클라쓰>(사진 왼쪽)와 또 다른 한국웹툰 <나 혼자만 레벨업>의 일본어판(사진 오른쪽) / 픽코마 SNS 갈무리

한국 웹툰 <이태원 클라쓰>의 일본어판인 <롯폰기 클라쓰>(사진 왼쪽)와 또 다른 한국웹툰 <나 혼자만 레벨업>의 일본어판(사진 오른쪽) / 픽코마 SNS 갈무리

눈치챘겠지만, 전자는 네이버웹툰 <여신강림>의 일본어판(라인망가)이고, 후자는 <이태원 클라쓰>의 일본어판 <롯폰기 클라쓰>(픽코마)이다. 새봄고 임주경과 이수호가 신슌고 타니카와 레이나와 칸다 슌이 됐고, 이태원 포차 ‘꿀밤’의 사장 박새로이가 롯폰기 이자카야 ‘벌꿀더나이트’의 사장 미야베 아라타가 됐다. 웹툰이 세계 곳곳에서 읽히고 만화왕국 일본에까지 팔리는 시대, 어떤 웹툰의 캐릭터들은 이렇게 이름과 국적이 바뀌어 ‘현지화(localization)’되고 있다.

한국과 일본 사이 현지화의 역사를 만화에 국한해 따진다면, 한국이 일본 만화를 한국화한 사례가 먼저다. 강백호는 원래 사쿠라기 하나미치지만 한국의 <슬램덩크> 팬이라면 누구나 그를 강백호로 기억한다. <도라에몽>의 노진구(노비 노비타)도, <은하철도 999>의 철이(호시노 테츠로)도 마찬가지다. <소년탐정 김전일>의 김전일도 사실은 긴다이치 하지메라는 일본인이다.

이렇게 일본 만화의 일본인 캐릭터가 한국 이름을 갖게 된 데는 일본문화가 전면 개방되지 않았던 1990년대 후반까지의 법적 규제가 가장 큰 배경이 됐다. 일본 만화 수입은 가능했으나 국내 출판을 위해서는 ‘일본색’을 지워야 했다. 그래서 기모노가 한복으로 덧칠되고 일본인은 한국인이 됐다. 출판 주체들이 일본문화에 대한 독자들의 거부 반응을 우려한 점도 영향을 끼쳤다.

지금 한국 웹툰의 일본 현지화는 상황이 꽤나 다르다. 일본 내 혐한 정서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나 극소수이고, 한국문화에 대한 법적 규제도 없다. 픽코마도 라인망가도 한국계 플랫폼이고, 그 안에서 이루어진 의사결정인 이상 일본 측에서 요청했기 때문이라 보기는 어렵다. 한국계 플랫폼 및 웹툰 제작사의 일본 진출 전략이 ‘일본인은 일본 만화(망가)만 본다’는 진단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라 봐야 할 것이다.

웹툰 플랫폼이 일본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현 상황을 놓고 볼 때, 이런 진단과 전략 자체는 맞아들어갔을지 모른다. 하지만 작품의 훼손까지 감내하며 지속해야 할지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 가령 <나 혼자만 레벨업>의 일본어판(픽코마)에는 DFN이라는 가상 국가가 등장한다. 원작에서 한국과 일본 헌터들이 힘을 합하기로 하는 것을, 일본어판에서는 일본과 DFN 사이의 일로 그려낸다. 주인공 성진우가 미즈시노 슌이라는 일본인이 됐기 때문이다. 일본어판 <나 혼자만 레벨업>의 세계 속에는 한국이 없다.

현지화는 유용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태원을 롯폰기로 바꾸고, DFN을 만들어넣을 만큼의 현지화까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양국의 창작자와 독자 모두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현지화의 적정선이 모색되길 바란다.

<조익상 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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