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백정 집안 출신이라는 비밀 밝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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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는 시마자키 도손의 첫 소설이다. 메이지학원을 졸업하고 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처음에는 시인으로 활동했다. 4권의 시집을 펴낸 뒤 집필했다가 1906년에 자비로 출간한 소설이 일본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작으로도 평가되는 <파계>다. 그보다 한 해 앞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잡지에 연재하면서 소설가로서 데뷔한 나쓰메 소세키로부터 “후세에 남겨야 할 명작”이라는 격찬을 받았다. 도손의 문학적 역량을 높이 산 소세키는 도손의 두 번째 소설 <봄>을 아사히신문에 연재하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시마자키 도손 지음·노영희 옮김·문학동네

시마자키 도손 지음·노영희 옮김·문학동네

소세키와의 인연을 적은 것은 모리 오가이와 마찬가지로 도손의 문학 역시 소세키와의 비교를 통해 잘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1906년에 발표된 소세키의 <도련님>은 <파계>의 좋은 짝이다. 두 소설 모두 주인공이 시골학교 교사로서 불의한 환경에 맞서 고투한다. 다만 장르 면에서 차이가 있는데 <도련님>이 권선징악적 모험담으로서 로망스적 세계에 속한다면, <파계>는 주인공의 내면을 다룬 근대소설에 한걸음 더 다가선다. <도련님>의 일인칭 주인공이 ‘도련님’으로만 불릴 뿐 이름이 나오지 않는 반면 <파계>의 주인공은 세가와 우시마쓰란 이름을 갖고 있다.

공통적인 배경은 메이지유신 이후의 신분제 철폐다. 봉건적 신분제 대신에 사민평등을 도입했는데, 1871년에는 백정 해방령도 단행해 천민으로 분류되던 이들이 평민으로 편입되었다. 우시마쓰는 바로 백정 출신의 신평민이었다. 하지만 제도상으로 평등이 실현된다고 해서 사람들의 의식과 습속까지 바뀐 건 아니었다. 이제까지 천대해왔던 이들을 사회가 동등하게 대우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고 진통을 거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에서 우시마쓰의 아버지는 세상에 나가려는 아들에게 신신당부한다. 어떤 경우에라도 백정 집안 출신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말고 숨기라고. 이것이 아버지의 훈계이자 우시마쓰가 지켜야 하는 계율이었다.

<파계>에는 우시마쓰와 같은 백정 출신의 인물이 둘 더 등장한다. 한명은 오히나타라는 거부다. 사업을 통해 큰돈을 벌었지만 백정이란 사실이 들통나면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내쫓기게 된다. 그가 그렇듯 봉변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시마쓰는 분개하지만, 아버지의 훈계를 다시금 뼈저리게 되새길 따름이다. 또 한명은 이노코 렌타로라는 인물로 백정 출신의 사회사상가다. 그는 당당히 자신의 출신을 밝히고 하층민을 대변해 사회적 차별에 맞선다. 우시마쓰는 렌타로의 책을 읽고 그의 사상에 깊은 감화를 받지만, 그처럼 행동할 수 있는 용기는 내지 못한다.

백정 집안 출신이라는 자신의 비밀을 밝힐 것인가, 숨길 것인가라는 두 선택지 사이에서 갈등하던 우시마쓰는 결국 스스로 계율을 깨뜨리게 된다. 아버지와 렌타로의 죽음이 하나의 계기였고, 주변에서 차츰 그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이 또 다른 계기다. 우시마쓰는 동료 교사들에게는 물론이고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들에게도 무릎을 꿇고 사과한다. 학생들은 그의 사직을 만류하지만 우시마쓰는 결국 학교를 떠난다. 그렇지만 그는 새로운 삶의 출발점에 서게 된다. 소세키의 <도련님>이 근대적인 변화를 꺼리면서 회고적인 시점으로 다루고 있다면 도손의 <파계>는 그 진통을 묘사하되 앞으로 나아가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현우 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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