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담의 심층-익숙한 옛날이야기 민담의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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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살펴보는 정신분석학에서 민담만큼 유용한 자원이 없다고 한다. 특정한 시간이나 공간을 언급하는 신화나 전설과 달리 ‘옛날 옛적에…’로 이야기의 핵심만 남아 있기에 인심을 비교하고 해부하는 데 적격이라는 것이다. 칼 융의 분석심리학을 전공한 일본학자 가와이 하야오는 그림 형제의 동화를 통해 세월의 풍화작용을 거친 민담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헨젤과 그레텔’이나 ‘들장미 공주(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익숙한 이야기는 물론 ‘트루데 부인’이나 ‘지빠귀 부리 왕’처럼 낯선 줄거리에서 융 심리학의 개념들을 이해하기 쉽게 풀이한다. 저자의 해석을 따라가다 보면 어린이에게 권선징악을 가르치기 위해 읽는 것이 민담이라는 고정관념을 해체할 수밖에 없다.

가와이 하야오 지음 고향옥 옮김·문학과지성사

가와이 하야오 지음 고향옥 옮김·문학과지성사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모성’에 대한 선입견이다. 어머니는 사랑과 헌신의 대명사이며 모든 것을 끌어안는 대지와 같다. 하지만 그레이트 마더(Great Mother)로 표상되는 태모(太母)의 속성 가운데 하나가 죽음이다. 땅은 만물을 낳는 동시에 묻어버린다. 언제까지나 품속에 안으려고 하는 모성의 원리가 자식의 독립을 방해해 정신적 죽음으로 내모는 부정적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가족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트루데 부인을 만나러 간 소녀는 나무토막으로 변해 순식간에 불길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지나친 호기심을 절제하라는 교훈적 측면도 있겠지만 마음 심층의 무의식이 공포와 외경의 영역이라는 것을 시사한다는 설명이 흥미롭다.

이런 맥락에서 헨젤과 그레텔도 무시무시한 모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캐릭터로 재해석된다. 대기근 때문에 남매를 버리자고 말하는 주체는 어머니다. 애초 친모로 전해졌지만 그림 형제가 너무 비인간적이어서 계모로 바꿨다고 한다. 엿듣게 된 아이들은 부모의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생존의 방책을 강구하는데 이것이 자립의 시작이다. 숲이라는 무의식의 세계를 헤매던 남매는 과자로 만든 집을 발견하고 이런저런 시련을 견뎌내면서 주인인 마귀할멈을 화덕에 밀어 넣은 다음 보물을 가지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다. 어머니로부터 분리되는 일은 ‘어머니 죽이기’로 표현될 만큼 어렵고 힘들지만 값진 보상이 약속된 과제인 것이다.

남성원리와 여성원리를 담고 있는 ‘게으른 세 아들’도 인상적이다. 임종을 맞은 왕은 왜 가장 게으르다고 판단한 셋째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줄까. 왕비가 없는 상황에서 코앞에 닥친 왕의 죽음은 왕국을 지배하던 기존의 남성적 질서에 변화의 불가피성을 암시한다. 돌파와 모험을 정체성으로 삼는 남성원리 대신에 수성과 유지를 트레이드마크로 하는 여성원리가 필요한 때인 것이다. 두 가지 원리 가운데 우열이 따로 있지는 않다. 모든 인간의 마음에는 대립되는 원리들이 미묘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민담의 묘미가 여기에 있다. 동일한 내용에 모순된 해석이 가능한 이야기를 통해 규칙과 변칙의 오묘한 상호작용을 알려준다. 약속을 지켜야 성공한다지만 어겨서 대성하기도 한다. 인간 만사를 단방에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이 없다는 지혜를 깨우치게 만드는 죽비로서 민담이 있는 듯싶다.

<정승민 독서팟캐스트 ‘일당백’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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