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비번, 당연히 진술 거부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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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죄를 네가 알렷다!” 사극에서 죄인을 심문하는 장면은 꽤 상투적이다. 추포된 죄인(피고인)이 관아 마당에 무릎을 꿇고 앉자마자 서슬 퍼런 고함이 날아든다. “놈이 이실직고할 때까지 곤장을 쳐라!” 자복하지 않으면 곤장을 맞고, 자복해도 곤장 세례다. 뭘 선택해도 흠씬 매질을 당하는 불합리한 선택지다.

한 이용자가 잠금화면 상태의 아이폰X를 들고 있다. / Photo by Yura Fresh on Unsplash

한 이용자가 잠금화면 상태의 아이폰X를 들고 있다. / Photo by Yura Fresh on Unsplash

이런 상황을 막고자 생긴 게 바로 자기부죄거부(自己負罪拒否) 내지 진술거부권이다. 범죄를 저질렀다고 기소되거나 의심받는 사람은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17세기 영국에서 청교도 혁명을 주도한 존 릴번은 ‘반정부 선동’ 혐의로 기소되자 불리한 답변을 하지 않겠다며 진술을 거부해 유죄 판결을 받았고, 이에 분개한 시민은 거리로 나섰다. 이후 미 수정헌법에 이런 원칙이 명문화됐고, 우리 헌법도 “모든 국민은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제12조 제2항)”는 규정을 1960년대부터 넣었다.

문제는 지난 12일 법무부가 ‘휴대전화 비밀번호 자백 강제’ 법률안 제정을 검토하고 있단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휴대폰 비밀번호를 제공하지 않아 악의적으로 수사를 방해하는 경우 비밀번호 제출을 강제하고, 불이행 시 제재가 가능한 법률 제정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법조계는 발칵 뒤집혔다. 대한변협과 민변, 참여연대 등이 한목소리로 반대 목소리를 냈다.

반발이 심해지자 법무부는 자기부죄거부가 생겨난 영국에도 그러한 법률이 있다고 해명했다. 법무부가 모델로 삼은 법안은 영국 수사권한규제법(RIPA)이다. 법 제3부 제49조는 “지역 법원(Circuit judge)이 발부한 서면 허가에 의해 피의자에게 휴대전화의 비밀번호를 공개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이 규정은 ▲국가안보 이익 ▲범죄 탐지와 예방 ▲영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 등에만 제한적으로 쓰인다. 실제 기소된 사례도 군사정보 유출, 총기 범죄, 아동 성 착취, 마약 유통, 살인 혐의 등이다. 국민의 기본권 침해와 악용의 위험성을 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는 법률이기도 하다.

우리 형법상 범죄의 증명책임은 오롯이 국가의 몫이다. 국가가 주권자인 국민의 자기방어권을 포기시키고 복종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다. 국민과 국가의 대결 구도로 이루어지는 형사재판에서 피의자와 피고인에게 최소한의 무기를 보장하려는 데 진술거부권의 의의가 있다. 우리 헌법재판소도 “진술거부권을 국민의 기본적 권리로 보장하는 것은 피고인 또는 피의자의 인권을 실체적 진실 발견이나 사회정의의 실현이라는 국가이익보다 먼저 보호함으로써 (중략) 피의자, 피고인과 검사 사이에 무기 평등을 도모하여 공정한 재판의 이념을 실현하려는 것”이라고 봤다.

휴대전화 비밀번호는 당연히 진술 거부의 대상이다. 이를 밝히지 않는다고 해서 제재를 가한다면 헌법상 진술거부권과 피의자의 방어권을 정면으로 침해하는 것이다. ‘네 죄를 네가 알렷다’라는 사극이 우리 형사사법에서 재현되도록 둬선 안 된다.

<백인성 변호사(KBS 법조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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