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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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와 유럽을 통합한 최초의 제국

‘세계는 하나’라는 상상이 현실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근대를 주도한 서양의 대항해 시대를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사실 개척자는 칭기즈칸이다. 아시아와 유럽을 사상 최초로 통합한 몽골제국은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를 마련했다. 밀레니엄을 맞아 세계의 언론이 지난 1000년 동안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칭기즈칸을 꼽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작해야 주변 민족과 나라만 생각하는 협애한 세계관에서 동과 서를 하나로 묶는 글로벌 패러다임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몽골제국의 역사적 의의는 21세기에 더욱 두드러진다.

김호동 지음·돌베개

김호동 지음·돌베개

중앙아시아를 전공한 역사학자 김호동은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에서 정주민 중심으로 고착된 세계사 인식을 비판하면서 몽골로 상징되는 유목민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18세기 이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유목 국가가 무슨 힘을 썼을까 싶지만 실크로드는 그 의문을 뒤집을 반증이다. 비단길은 로마와 한(漢)을 잇는 횡단로일 뿐만 아니라 초원과 농경을 연결하는 종단로이기도 하다. 교역은 때때로 수익 이상의 목적을 초과 달성하면서 유목문화와 정주문화에 자극과 긴장을 불어넣는다. 북방 유목민에 맞선 남방 농경민의 대응은 도전과 응전의 세계사 드라마를 연출했다.

아무튼 북방 몽골리아 일대에서 형성된 강력한 리더십은 한반도에서부터 유럽과 아랍까지 명실상부한 세계제국을 빚어냈다. 흔히 칭기즈칸과 그 후손들의 탁월한 지도력에 초점을 맞추지만 거꾸로 강력한 라이벌인 중국이 존재했기에 흩어지기 쉬운 유목민들이 단일대오로 뭉칠 수 있었다. 용감하다는 뜻을 가진 ‘몽골’ 부족은 문헌상 8세기경에 처음 등장한다. 초원의 변두리에서 서서히 중앙으로 진출한 몽골인은 잦은 내전을 딛고 새로운 조직 원리에 입각한 국가를 건설한다. 칭기즈칸이 군주로 추대된 1206년 이후 몽골은 파죽지세였다.

고작 수십만에 불과한 인구로 어떻게 세계제국을 만들었는가. 정복전쟁의 원동력이 된 ‘천호제’, ‘자삭’이라고 부르는 법령, 친위대에 해당하는 ‘케식’은 왕권의 강화와 안정을 가져왔다. 독불장군 스타일의 유목민이 명령에 살고 죽는 조직화된 군대로 탈바꿈하면서 전투력이 급상승한 것이다. 여기에 광활한 정복지를 경영하는 통신과 운송 시스템을 구축했다. ‘잠’이라는 역참제는 중국에서 유럽까지 불과 열흘 남짓 만에 메시지를 전파할 수 있는 제국의 신경망이자 동서양의 문물이 오가는 혈관계였다. ‘팍스 몽골리카’의 개막으로 마르코 폴로와 이븐 바투타는 세계를 종횡무진 누비게 됐다. 근대 자본주의의 신호탄이 된 유럽의 ‘대항해 시대’는 ‘잠’을 이용한 ‘대여행의 시대’에 큰 빚을 진 셈이다.

무엇보다 몽골을 전대미문의 대제국으로 만든 핵심은 현지의 풍속과 관습을 존중하는 본속주의에 입각한 관용적 자세다. 온갖 종교와 인종이 다 함께 공존하는 글로벌 문화를 이미 800년 전에 꽃피웠다는 사실은 폭력과 테러로 몸살을 앓는 오늘의 인류에게 희망의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정승민 도서팟캐스트 일당백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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