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먼 것은 먼 것대로, 가까운 것은 가까운 것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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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카 솔닛은 페미니스트 작가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의 저자다. 이 책을 유명하게 만든 말이 ‘맨스플레인’이다. ‘맨스플레인’이 솔닛이 만든 단어는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은 남성들이 여성을 뭔가 가르쳐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맨스플레인’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해 세계적으로 널리 읽혔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마음의 발걸음> 등의 저자 리베카 솔닛 / 경향자료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마음의 발걸음> 등의 저자 리베카 솔닛 / 경향자료

<멀고도 가까운>은 결이 좀 다른 책이다. 고통스러웠던 한 시기를 통과해 낸 솔닛의 자전적 에세이다. 이 책은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를 물으며 시작한다. 우리는 이야기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을 듣는 법을 배워야 하고, 이야기꾼이 되어 자신의 길을 열어야 한다고 솔닛은 말한다. 그리고 솔닛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50대에 마주한 새로운 인생의 시련

솔닛의 어머니는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었다. 어머니는 응급상황이 닥치면 솔닛에게 전화했다. 솔닛이 다른 형제가 아니라 왜 자기에게만 연락하는지 물었다. 어머니는 솔닛이 딸이어서, 그리고 집에만 있어서라고 말했다. 아들에겐 좋은 것만 보이고 딸에겐 궂은일만 맡기려는, 그리고 작가로서의 딸을 인정하지 않는 말이었다.

어머니는 솔닛의 금발을 질투했다. 자기보다 키가 작은 걸 지적하며 트집을 잡았다. 솔닛은 ‘백설공주’를 떠올렸다. 어머니의 이야기는 끝없는 비교와 시기심의 이야기였다.

어머니의 입장이라면 ‘백설공주’가 아니라 ‘신데렐라’를 선택했을 거라고 솔닛은 생각했다.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의존했던 딸이었다. 활달한 언니와 예쁜 동생 사이에 과소평가된 아이였다. 솔닛이 중요한 일을 이야기하면, 어머니는 자신의 두려움과 불평거리로 화제를 돌렸다.

미국 서부를 여행하던 솔닛은 래프팅 안내인에게 같이 가겠느냐는 갑작스러운 제안을 받았다. 솔닛은 “네”라고 답했다. 솔닛은 그 대답이 인생의 커다란 이정표가 됐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두려움과 의무감으로 솔닛에게 “안 돼”를 가르쳤다. 솔닛은 모험에 대해 “네”라고 대답함으로써 내면화된 어머니로부터, 어머니의 이야기로부터 벗어났다. 어머니가 급속도로 악화되는 중 솔닛은 아이슬란드에 초대받았다. 망설이지 않고 응했다. 그런데 뜻밖에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 솔닛은 새로운 인생의 시련에 마주했다.

여기까지 읽은 소감을 말하면, 이건 정말 50대가 만나는 세상이다. 50대에 이르면 노년기를 보내는 부모님은 크고 작은 건강문제와 부딪치고, 내 몸도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다. 솔닛의 경우는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어머니를 돌보는데다 본인까지 암 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제 솔닛은 병과 고통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솔닛은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이야기를 듣다 나병에 대해 알게 됐다. 나병 환자들의 손과 발을 상하게 하는 건 병 자체가 아니라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된 환자 본인이 그 부위를 돌보지 않아서였다. 솔닛은 인간이 자기 몸을 하나의 전체로 인식하는 데 고통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발견했다. 자아의 경계는 자신이 느끼는 것에 의해 정해진다.

[오십, 길을 묻다](33)먼 것은 먼 것대로, 가까운 것은 가까운 것대로

나병 환자 이야기는 솔닛으로 하여금 감정이입을 새롭게 생각하게 했다. “무감각이 자아의 경계를 축소시키는 것이라면, 감정이입은 그 경계를 확장한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체 게바라의 일기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의대생이었던 체 게바라는 나병환자촌을 찾아다녔다. 체 게바라는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감정이입을 통해 자아를 확장하고 세계로 나아갔다.

솔닛의 투병은 혼자이지 않았다. 솔닛은 미숙아를 돌보는 친구, 암 투병을 막 시작한 친구가 들고 온 이야기들로 치료를 견뎠다. 암 투병을 하던 친구는 벽에 석고로 섬을 만들고, 그 섬들을 가늘고 빨간 실로 이은 지형도를 만들었다.

거미줄이나 지푸라기로 무엇인가 만드는 이야기의 여주인공들, 끊어지지 않는 실 같은 이야기로 목숨을 이어간 <아라비안나이트>의 셰에라자드, 밤이면 낮 동안 짰던 수의를 풀어버리던 <오디세이>의 페넬로페. 솔닛은 이들이 실을 잣고 천을 푸는 과정을 통해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내 앞에 산더미처럼 놓인 이야기들

“이야기는 대상을 묶어내는 실이었고 그 실로 세상이라는 천이 직조되었다. 강력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서로 이어져 있음을, 그렇게 이어져 패턴을 이루고 있음을 본다.”

어머니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자신의 이야기를 잃어버렸다. 솔닛은 어머니의 내리막길을 함께하며 자신이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어머니와 관계가 좋지 않은 시절엔 어머니와 닮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이제 솔닛은 어머니가 자신의 취향, 관심사, 가치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를 선선히 받아들였다.

자신의 이야기 꾸러미를 정리하면서 솔닛이 찾아낸 말은 고대 그리스어 ‘시그노미’다. ‘이해하다, 공감하다, 용서하다, 봐주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그노미를 내 방식으로 말하자면, 이해를 위해선 감정이입이 필요하고, 감정이입을 위해선 공감이 요구되며, 공감을 통해 용서가 이뤄진다.

솔닛이 보기에 어머니는 자신의 욕망과 그 욕망 안의 모순을 모른 채 알 수 없는 힘에 휘둘렸던 여인이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열심히 살았던 사람이라고 솔닛은 회고한다. 이를 통해 비로소 솔닛은 ‘복수와 용서’라는 계산에서 벗어나고, 있는 그대로의 어머니를 바라본다.

제목 <멀고도 가까운>이 의미하는 건 바로 이것이지 않을까. 어머니는 먼 존재였지만, 이야기를 통해 가까운 존재가 됐다는 발견을 담고 있다고 나는 해석하고 싶다. 먼 것은 먼 것대로, 가까운 것은 가까운 것대로 받아들이는 게 삶이자 사랑이지 않을까.

<멀고도 가까운>의 앞부분에는 엄청난 살구 더미가 나온다. 어머니의 살구나무에서 딴 살구였다. 이 살구를 솔닛은 의미를 찾아야 하는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솔닛은 상한 살구는 버리고, 실한 살구는 먹고, 나머지는 잼과 절임과 술을 만든다. 삶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살구에 비유한 거라면, 이런 살구 더미는 내 앞에도 산더미처럼 놓여 있다. 어떤 건 소중한 이야기고, 어떤 건 마음 아픈 이야기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다시 생각하면 뜻깊은 이야기도 있다.

인생을 절반 정도 살았으니 이제 살구를 골라야 할 나이에 도달한 것 같다. 소중한 것은 기억으로, 잊어야 할 것은 망각으로, 미처 눈에 띄지 않은 것은 비어 있는 마음으로 보내야겠다. 우선 내 어머니와의 이야기부터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성지연(국문학 박사·전 연세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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