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행복이 가진 다양한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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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가 넘쳐 방바닥에 쌓여가는 책을 볼 때마다 이제 책을 좀 신중하게 사야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제목에 ‘행복’이 들어간 책을 잘 지나치지 못한다. 무의식으로 행복하고 싶다는 마음이 움직인 거다. 행복에 관한 책을 읽는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한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고 온 시민들이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 강문식 제공, 경향자료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한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고 온 시민들이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 강문식 제공, 경향자료

“오늘날에는 누구나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들 생각할 뿐만 아니라 행복을 당연한 듯이 기대하는 분위기다. 따라서 나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현대의 독특한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다. 바로 대린 맥마흔이 ‘행복하지 않음의 불행’이라고 표현했던 병이다.”

미국의 작가 에릭 와이너는 2008년 출간한 <행복의 지도> 프롤로그에 이렇게 써놓았다. 와이너는 행복한 곳을 찾기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취재를 했다. 그 결과로 <행복의 지도>라는 526쪽짜리 책을 펴냈다. 와이너는 자신이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행복하고 싶어 하는 병에 걸려 있다고 고백한다. 책 곳곳에서 마주치는 와이너의 유머감각인 동시에 행복에의 집착에 대한 경계다.

다른 나라에서 찾은 행복의 원천

와이너는 해외특파원으로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런데 뉴스거리가 있는 나라들을 돌아다니는 건 불행한 나라에 사는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수집하는 일이었다. 뉴스란 원래 그런 게 아닌가. 그러다 문득 아무도 소식을 전하지 않는 행복한 나라들을 찾아보기로 결심한다. 와이너는 먼저 행복에 반드시 필요할 게 어떤 것인지를 생각한다. 돈, 즐거움, 영적 깊이, 가족, 초콜릿 같은 게 행복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런 것을 한가지 이상 갖고 있는 나라들을 찾아간다.

와이너는 네덜란드에 있는 ‘세계행복데이터베이스’를 방문했다. 이 기관에 따르면, 네덜란드의 행복 척도는 1등에 가깝다. 와이너가 이 나라의 특징으로 생각하는 것은 관용이다. 네덜란드의 관용은 마약과 성매매에까지 이른다. 그런데 쾌락 혹은 즐거움에 대한 이런 관용적 태도가 행복을 증진시키고 있는 걸까.

와이너는 쾌락과 행복의 관계를 보여주는 철학자 로버트 노직의 ‘경험 기계’를 떠올린다. 뇌를 자극해 기분 좋은 경험을 하도록 하는 경험 기계를 만든다면 당신은 거기에 들어가겠는가. 여기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선택은 즐거움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증거라는 게 노직의 주장이었다. 세계행복데이터베이스의 연구자는 행복과 흥분제 사이의 관계가 뒤집어진 U자 곡선으로 나타난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즐거울수록 행복한 게 아니라 즐거움도 적당해야 한다는 거다.

세계행복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스위스 역시 행복의 상위권에 속하는 나라다. 스위스가 부유하고 깨끗하고 훌륭하게 관리되는 사회인 건 분명했다. 그런데 와이너의 시선에는 권태로운 사회로 보였다. 와이너가 만난 스위스인은 행복의 원천이 시기심을 피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인들이 사회의 낙오자가 되는 걸 두려워한다면, 스위스인들은 갑자기 화려하게 부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와이너는 스위스인들의 행복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단어를 만든다. ‘만족 기쁨’이다. 단순한 만족감과 기쁨 사이에 위치한 감정이다.

북유럽 섬나라 아이슬란드는 어떨까. 세계행복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아이슬란드도 행복한 나라 중 하나다. 이 나라에서 주목할 수 있는 건 문화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에게 언어는 엄청난 기쁨의 원천이고, 수도 레이캬비크는 창의력이 꽃피는 코스모폴리탄 마을이다. 한 아이슬란드인은 레이캬비크에 창의성이 넘치는 게 시기심이 없어서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함께 일하고 새로운 트렌드를 널리 공유한다.

흥미로운 건 아이슬란드에선 실패가 낙인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이슬란드인에게 실패는 양념이 아니라 중심이다. 그래서 두려움 없이 ‘엉터리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예술의 세계에서는 그 엉터리 작품들이 중요한 역할을 해낸다. 불행한 예술가라는 고정관념은 아이슬란드 예술가들에겐 적용되지 않는다. 와이너가 만난 수십명의 예술가는 대체로 행복했다. 심지어 우울증을 앓으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행복하지 않으면 불행한 걸까?

어크로스

어크로스

와이너가 마지막으로 다루는 곳은 자신의 나라 미국이다. 미국인은 3분의 2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다. 10명 중 8명은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 행복에 대해 생각한다. 자기계발 산업의 규모만으로도 초강대국이다. 미국인들은 어딘가에 있을 행복을 찾아 끝없이 이사한다. 하지만 와이너는 1950년대보다 3배나 부유해진 미국이 그만큼 더 행복해지지 않은 것은 어떻게 된 일인지 묻는다.

와이너가 다루고 있지 않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떨까. 1950년대 후반까지 1인당 GDP는 100달러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3만달러를 넘는다. 경제가 성장한 300배만큼 행복해졌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을 거다. 와이너가 행복의 조건으로 보여준 관용의 문화, 적절한 즐거움, 절제된 시기심, 실패의 용인 등은 숫자로 셀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먼저 주목하고 싶은 건 돈과 행복의 관계다. 물질적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행복을 바라는 데는 한계가 있다. 배가 고픈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와이너에 따르면, 돈으로 행복을 사는 건 1년에 1만5000달러 정도까지 가능하다고 한다. 그 선을 넘으면 더 이상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는 거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얘기다. 어느 정도의 물질적 의식주가 충족돼야 행복이라는 주관적 감정이 생겨날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진짜로 행복해지기 위해선 이제 다른 것들, 앞서 말한 절제된 시기심이나 너그러운 관용 같은 주관적 감정이나 제도화된 문화가 요구된다. 와이너는 이러한 비물질적 조건이 나라에 따라 다르다고 주장한다. 행복은 그 나라 안에서도 사람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갖는 것 아니겠는가.

너무 행복하고 싶은 마음이 오히려 행복을 해칠 수 있다. 남들은 다 행복한 것 같은데 왜 나만 이럴까, 자책과 우울이 깊어진다. 나이를 먹는 건 결국 살다 보면 좋은 날도 좋지 않은 날도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일이다. 좋은 일은 좋은 일대로 즐기고, 좋지 않은 일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로 넘기는 게 낫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행복하지 않으면 불행이라고 느끼는 것은 병일까. 그 반대로 불행하지 않은 게 행복일 수도 있지 않을까. 사는 모습이 다 다른 만큼 행복의 모습도, 불행의 모습도 다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게 오십이라는 나이인 듯하다. 이제는 행복과 불행을 함부로 단정 짓지 말아야겠다.

<성지연 국문학 박사·전 연세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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