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질문이 너무 무겁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것,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오십 년을 넘게 살았어도 이 질문에는 답을 못 내놓겠다. 러시아 작가이자 사상가 레프 니꼴라예비치 톨스토이는 1882년 펴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이 질문을 감당한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1908년 손자들에게 동화를 들려주고 있다. / 경향 자료사진
어렸을 때 이 작품을 동화책으로 읽었다. 지금 읽고 있는 것 역시 동화책으로 나온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다. 어린이들 읽기 좋으라고 쓴 큰 글씨가 나이 든 내 눈에 시원하다. 이해하지 못했던 문장들을 수십년 만에 다시 읽어나간다. 그리고 다음의 문장에 오랫동안 눈이 멈춘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한 걱정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들의 생각일 뿐, 사실은 오직 사랑에 의해서만 살아간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눈이 멈춘 문장들
신의 명령을 어긴 벌로 인간 세상에 떨어진 천사는 세가지 깨달음을 얻고 신의 용서를 받는다. 깨달음을 얻은 이야기를 하면 좀 길다. 가난한 구둣방 주인 쎄묜이 있었다. 빌려준 돈을 받아 모피코트를 해 입으려고 길을 나섰다. 돈을 못 받아 홧김에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데 교회 뒤에서 벌거벗은 남자를 보았다. 봉변을 당할까봐 얼른 지나치려던 쎄묜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 남자를 집에 데려왔다.
이 미하일이라는 남자는 세 번 웃었다. 첫 번째, 쎄묜의 아내 마뜨료나가 저녁을 대접하자 웃었다.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사랑이었다. 몸을 따뜻하게 할 코트 하나가 절실한 추운 나라다. 길에 벌거벗은 사람이 있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 누가 됐든 지나가던 모르는 사람이 돕지 않을까. 비록 사는 게 고달파 사납게 굴더라도 그의 가슴에 사랑이 있는 게 분명하다.
두 번째, 일년은 끄떡없도록 튼튼한 신발을 만들지 않으면 혼내줄 거라는 신사를 향해 웃었다. 그렇게 말했던 신사는 일년 후를 기약하기는커녕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죽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겐 자기 몸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게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미하일은 웃었다.
세 번째, 부모 없이 잘 자라는 쌍둥이를 전송하며 웃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신이 미하일에게 준 임무는 이제 막 쌍둥이를 낳은 엄마의 영혼을 데려가는 거였다. 엄마는 아이들을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애원했고 미하일은 빈손으로 돌아갔다. 신은 다시 가서 여자의 영혼을 데려오면 앞의 세가지 질문의 답을 알게 될 거라고 말했다. 돌아와 여자의 영혼을 빼앗은 미하일은 날개를 잃고 추락해 쎄묜과 조우했다.
그리고 6년 후 아이들 구두를 맞추러온 한 가족을 만났다. 아이들은 미하일이 걱정이 돼 신의 명령을 어기기까지 했던 쌍둥이였다. 옆집 여자가 아이들을 데려가 자기 아이와 함께 키웠다. 여자는 두 살 때 자기 아이를 잃었다. 여자는 남은 두 아이가 자신에겐 촛불과 같다고 말했다. 다른 여자의 마음속에 있던 사랑이 쌍둥이를 불쌍히 여기고 돌보게 했던 것이었다. 진작 알았으면 신의 명령을 어길 필요가 없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사는 거였다. 세가지 깨달음을 얻은 미하일은 다시 날개를 펼치고 하늘로 올라갔다. 미하일은 대천사 미카엘의 러시아 이름이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와 <안나 까레니나>를 발표한 후 세계적인 명성을 누렸다. <부활> 또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백작 가문에서 태어난 톨스토이는 젊어 방탕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이후 인생에 대한 깊은 고민과 종교적 성찰을 거쳐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톨스토이의 회심’이라고도 불리는 이 고뇌의 기간은 그가 50대에 발표한 <참회록>에 잘 담겨 있다.
톨스토이는 사상가로서의 면모만 보인 게 아니었다. 농민의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워 아동교육에 뛰어들었고, 빈민구제 활동을 벌였다. 또 사유 재산을 부정했고, 이로 인해 아내 소피아와 불화를 겪기도 했다. 이러한 톨스토이의 사상과 행동은 제정 러시아 당국과 갈등을 일으켰다. 당국은 톨스토이의 비판적인 글은 검열했고, 그의 글을 실은 잡지를 판매 금지했다. 더하여, 교회에 대한 비판으로 러시아정교회는 톨스토이를 파문하기도 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나 “사람에게는 땅이 얼마나 필요한가” 같은 글들은 사상가이자 사회운동가로서의 톨스토이의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복음서의 이야기와 전해 내려온 민화들을, 아이나 어른이나 많이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모두 읽을 수 있도록 엮었다. 그래서 동화로 분류되고, ‘민화’로 불리기도 했다.

창비 아동문고
어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작품들은 예술적 성취를 목표로 하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톨스토이 자신이 깨달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을 전달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그것도 어떻게 하면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고심해가며 창작한 글들이다. 톨스토이에게는 예술보다 삶이 먼저였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다시 한 번 물어본다.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가 톨스토이가 내놓은 답이다. 이걸 딱 붙들고 살면 세상에 불안할 게 없다. 추운 겨울날 벌거벗은 채 길 위에 있어도 이웃의 도움으로 살길이 열릴 거라고 믿을 수 있으니 말이다. 모두가 다 이 답을 믿는다면 거기가 바로 낙원이다. 톨스토이의 동화를 읽는 순수한 어린이들은 이렇게 믿을 거다. 톨스토이가 특별히 아동교육에 힘을 쓰고 동화를 썼던 마음이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른은? 어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른도 믿고 싶다. 모두의 마음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 그게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사랑보다 앞에 놓인 게 있지 않은가. 먹고사는 문제 말이다. 사랑만 먹고살 수는 없다. 게다가 내가 사랑하겠다고 마음먹어도 그 사랑이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사랑이 사랑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무관심으로, 불안으로, 상처로 이어질 수도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사랑만으로 살아가기에는 내가 너무 순진하고, 사랑을 부정하기에는 삶이 너무 황량해진다. 내 방식의 해석을 시도한다. 톨스토이가 전하려 한 것은 사랑이 삶의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이라고 나는 보고 싶다. 삶은 필요조건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충분조건이 필요하다. 그러나 충분조건이 성립되려면 먼저 필요조건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이러한 깨달음이 오십에 도달한 지혜라고 나는 믿고 싶다.
<성지연 국문학 박사·전 연세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