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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목숨 팔아 밥 먹고 산다면 에미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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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절규한 전태일이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되었다.
이후 그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도 사회 부조리에 맞서 약자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데 앞장섰다. 2009년 이소선 여사의 인터뷰 중 미공개 내용을 공개한다.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소선 어머니. 2009년 12월 29일 경향신문 사진부 김석구 기자가 촬영했다. / 경향신문 자료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소선 어머니. 2009년 12월 29일 경향신문 사진부 김석구 기자가 촬영했다. / 경향신문 자료

지금도 사진처럼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막차가 끊길 시간, 소리없이 눈 내리던 동대문의 좁은 골목길. 인터뷰를 시작할 때는 저녁노을이 꼈는데 초저녁부터 진눈깨비가 내려 제법 쌓인 길이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가로등을 등지고 손을 흔들며 기자를 배웅해줬다. 어머니는 배웅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이렇게 찾아와줘서 고마워요.” 정이 많은 분이었다. 돌아가실 때까지 다시 만나진 못했다. 그 뒤 두세 차례 안부 전화를 한 것이 전부였다.

당시 2010년을 앞두고 연중기획으로 한국현대사의 상징적인 장소와 사건현장을 찾아 현재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기사를 기획하고 있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와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와 함께한 기획이었다. 전태일 사건 40주기였다. 두 사람은 전태일 열사 흉상이 세워진 버들다리를 방문했고, 기자는 서브 기사로 이소선 어머니 인터뷰와 ‘평화시장의 오늘’을 되짚어보는 기사를 맡았다.

이소선 어머니 인터뷰 기사는 3페이지, 25매 분량의 기사였다. 취재기록에 따르면 인터뷰는 2009년 12월 29일 오후 5시에 시작해 밤 11시 45분까지 진행했다. 노트북으로 받아적은 것만 250매 분량이다. 당시 만든 질문지를 보니 총 25개 질문을 준비해갔다. 당연, 인터뷰한 이야기를 전부 기사에 담을 수 없었다. 2011년 9월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올해는 전태일 50주기다. 그 50년은 동시에 노동자의 어머니로 이소선 어머니가 눈을 뜬 50년이기도 하다. 내년이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도 10주년이다. 그때와 지금은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10년 전 인터뷰에서 미공개했던 내용을 나누고자 하는 이유다.

“이명박이 노무현 대통령을 죽였다”

2009년 우리는 두 전직 대통령을 잃었다.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해 여름 8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김 전 대통령은 전 대통령 이명박씨 측의 저지로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추도사도 읽지 못하고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세상이 달랐다면 두 전직 대통령은 천수를 누렸을까. 인터뷰를 하면서 방을 둘러보니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근조’ 검은 리본과 사인여천(事人如天), “사람을 쓰되 하늘 같이 여겨라”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가 눈에 띄었다. 두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물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은 유가협(편집자 주: 전국 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이소선은 이 단체의 회장을 과거 수년간 맡았었다) 이전부터 깊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 대통령이 돌아가신 뒤 애통한 마음은 말로 어떻게 다 표현하겠어요. 건강이 좋지 않아 노 대통령 돌아가신 곳(봉하마을)은 못 가고, 서울시청 앞에 분향소가 있어서 분향했습니다. 분향하러 가서 그랬어요. 가서 보니 시민들이 빈소를 차려놨습디다. 거기 가서 향불 켜놓고 꽃 가져다 놓고 내가 소리를 질렀어요. 이명박이가 노 대통령을 죽였다, 그렇게 죽게까지 만든 것은 너무 잔인한 거 아니냐고.”

김 전 대통령과 인연은 전태일 열사 분신 직후부터였다. 전태일의 평화시장 동료들이 블록 천막으로 되어 있는 이소선 어머니 집에 모여 있는데 찾아와서 사정을 듣고 ‘이렇게 해야 한다’고 대책을 논의했다. 전태일 열사 분신일이 1970년 11월 13일이니, 신민당 대통령 후보 시절이었다. “장례식하고 오는 날 왔어요. 원래 박정희도 온다고 했는데 김대중이 온다고 하니 ‘태풍 피해 시찰 때문에 시간 내기 어렵다’고 핑계 대며 안 옵디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1987년 8월 거제도에서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장례투쟁을 같이하며 맺어졌다. 이 사건으로 노 전 대통령은 구속되고 이소선 어머니는 수배를 당한다.

지난 2010년 7월 16일, 민주노총이 영등포 시대를 마감하고 정동으로 옮겼다. 이소선 여사(가운데) 왼쪽으로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 고 노회찬 당시 진보신당 대표, 오른쪽으론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이정희 의원,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등이 현판식에 참여했다. / 강윤중 기자

지난 2010년 7월 16일, 민주노총이 영등포 시대를 마감하고 정동으로 옮겼다. 이소선 여사(가운데) 왼쪽으로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 고 노회찬 당시 진보신당 대표, 오른쪽으론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이정희 의원,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등이 현판식에 참여했다. / 강윤중 기자

인터뷰 내내 이소선 어머니는 ‘고마운 사람들’이라는 말을 되뇌었다. 어머니의 삶은 늘 투쟁현장에 있었다. 그때마다 많은 사람의 도움이 있었다. 이석규 열사 장례투쟁 때 도피자금으로 쓰라고 수중의 돈 3만원을 털어 건넨 고 노무현 대통령도 있었고, ‘엄마 추운데 왜 여기 있어요’라고 택시비를 쥐여주고 떠난 생판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10년 전인 2009년에도 ‘어머니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용산 참사 대책위를 이끌어 수배된 인권활동가 박래군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전 유가협을 만들고 내가 회장을 5년 할 때는 내가 다 가르쳐줬는데, 지금은 박래군이 내 스승이란 말이에요. 나는 평생을 공부하고 살았어요. 물어보니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인간의 양심이 좁쌀만큼이라도 있다면, 동네 개가 죽어도 산에 갖다 묻어주는 것이 양심의 도리 아니겠어요. 현 정권(이명박 당시 정부)은 그걸 전부 처리해주면 앞으로 그런 사건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으니 사람이 죽고 1년이 넘도록 냉동실에 넣어두고 있는 겁니다.’ 그게 맞다고 했죠.”

용산 참사·쌍용차 투쟁 현장의 이소선

-세상을 등진 평택 쌍용차 해고노동자도 우울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아들이 마지막 죽을 때 나한테 말을 해줬어요. 근로기준법을 배우라고. 무허가촌에서 풀숲 뫼 사이에다가 화전민으로, 남산 케이블카 밑에 살았는데 집만 칸칸이 만들어놨는데 거기다 불을 내버리고 쫓아냈어요. 그래서 거기서 살다가 도봉동으로, 봉천동으로 가라는 사람은 봉천동으로 가고, 쌍문동 208번지에 태일이하고 태삼이하고 살게 된 것이 1970년이었어요. 그때부터 시작해서 우리 아들이 ‘엄마 근로기준법 책 하나 사려면 비싼데 얼마만 주면 사는데, 나는 배워야 하는데 돈이 없어’ 그랬어요. 중앙시장에서 엿장수 고물장수가 가져온 헌옷을 못 입고 내버리면, 그걸 사다가 도봉동 천주교묘지, 연산군묘지 뒤에 가면 물이 내려오는데 거기서 빨아서 바위에 널어 말려서 집에 가져와 떨어진 곳은 꿰매고 해서 파는 거지. 새벽부터 가서 빨아서 열나게 하면 중앙시장으로 해가 지기 전에 나갈 수 있어요. 그걸 팔아서 우리 딸 둘, 아들 둘 나까지 다섯이서 사는데 밤이면 그렇게 늦게 와요. 남들은 동네가 조용히 자는데 우리 아들 둘은 안 오는 거야.”

집까지 오는 버스를 타는 대신, 다락방 공장의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서 먹이고 자신과 동생 태삼은 걸어서 도봉동 집까지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평전>에도 실려 있는 이야기다. 배움에 대한 갈구는 ‘대학생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소원으로 이어졌다. “근로기준법 책을 돈을 보태 샀는데 한문을 몰라서… 태일이가 ‘엄마 친구 중에 대학생 아들 있는 사람 있지 않냐’고 하는데 빈민촌에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이튿날 나가서 ‘우리 동네에 대학생은 없지만, 여기에 있는 아는 엄마들 친척이나 아는 대학생 있는 사람 소개해줘라’라고 하니 누가 ‘저기 밑에 이북에서 피란 온 아저씨가 대학 나왔다’고 해요. 그 아저씨에게 내가 가도 만나줄까 자신이 없었는데 그냥 무작정 갔어요. 가니 ‘아주머니 어떻게 오셨습니까, 국수 사러 왔습니까’라고 해요. 아저씨에게 말씀 좀 여쭤보려고 왔다, 우리 아들이 아저씨가 대학을 나왔다고 하니, 한문 모르는 것이 있어서 하루에 한 자씩 배우면 좋겠는데, 아저씨가 밤에 주무시는데 가보기가 미안해서 엄마보고 여쭤봐달라고 해서. 그러니까 ‘아 180도로 인사하는 그 청년이요? 그 친구 예의가 바르더군요. 사람만 봤다 하면 ‘안녕하십니까, 진지 잡수셨습니까’ 하고 묻고, 아이는 보면 만져주고 코 닦아 주고, 인사 잘하는 총각이라고. ‘그 친구라면 새벽 세시라도 만나줘야지요.’ 그 뒤로 태일이가 다녀오면 손 씻고 낯 씻고 아저씨에게 가는 기라. 근로기준법 책을 들고.” 이소선 어머니가 ‘귀식이 아저씨’라고 기억하는 아저씨와의 일화다.

청계천 평화시장 재단사 시절 전태일(가운데)와 바보회 회장 명함 / 전태일 재단

청계천 평화시장 재단사 시절 전태일(가운데)와 바보회 회장 명함 / 전태일 재단

전태일이 분신을 결심하게 된 이유

전태일은 삼각산 수도원에 들어가 바위를 곡괭이로 파고 남는 시간에 지하실에 들어가서 근로기준법 공부를 했다. 경향신문에 평화시장 실태에 대한 보도가 난 뒤 뛸 듯이 기뻐했지만 국정감사가 끝나고 시들해지자 태일이는 어떤 ‘결심’을 한 것 같았다고 그는 회상했다. “한날은 사람이 찾아왔어요. 이렇게 뭐를 펴보고 그러더라고. 전태일이라는 사람이 저기 삼각산 뒤에 올라가서 바위에다가 자기 글을 써서 넣어놔서 왔는데, 부엌에 들어서서 마주쳤어요. 그 사람이 말하길 ‘자네가 전태일인가. 눈을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어요. 태일이가 ‘돈을 가지고 조그마한 기업을 해서 우리끼리 일을 해서 똑같이 나눠서 가지면 아프면 서로 도와주는 단체도 만들고 그래서 눈을 팔려 했다’고 하니 ‘자네 생각은 좋지만 현실에서 돈을 그렇게 내놓을 사람이 있겠느냐’ 하더니 둘이 나갔어요. 나는 못 들은 체하고 가만히 있는데 태일이가 실망한 얼굴로 돌아왔어요. 저 사람 누구냐고 하니 ‘엄마는 알 필요 없어요, 틀렸어’라고 답을 했어요.”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동생 태삼씨가 거든다.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주위에 알렸어요. 목사님·장로님, 언론에다도 이야기해 봤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 전부가 바보라고 했던 거예요. 그래서 바보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취임해 명함을 만들어 그걸 도봉산에다 끼워놓았는데, 그걸 보고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겠다고 사업계획서를 만들어본 거예요. 그걸 실행하려면 돈이 필요하니 신문에 나온 사회복지사 이야기를 읽고 자신의 눈을 나누겠다는 것이었는데….” 태삼씨의 회고는 ‘분신 결행’을 결심하게 되는 것까지 이어진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글을 남기면서 그 일(분신)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과정을 철저하게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나는 이 일을 포기할 수 없다. 시다들의 손을 놓을 수 없다. 생명체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결단을 삼각산에서 한 것이에요. 사람이 땅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본 다음에 창조주 하느님이 모든 것을,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은 다 임의대로 생명을 주지 않으면 안 되는구나 하는 것을 철저하게 이해하게 된 겁니다. 자신은 이 일을 하다가 이 세상 이후에서 또다시 추방당하는 일이 있어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형의 뜻이었습니다.”

이소선의 삶이 한국사회에 던지는 울림

자식을 잃은 어머니에겐 그때의 기억이 어제 일어난 일처럼 못에 박혀 있다. “병원에 가보니 태일이가 피를 쏟으면서도 ‘엄마, 내가 지금 부탁하는 말을 들어줘야 해’라며 여러 이야기를 꺼냈어요. 그때 ‘태일이는 죽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하나’고 생각했어요.” 당시 전태일이 누워 있는 명동 성모병원에 전국에서 학생·재야인사들이 모여들었다. 방송에 나온 이소선은 평화시장 노조설립 등 장례에 앞서 선결되어야 하는 8대 요구조건을 내건다. “돈도 싫고 뭣도 싫고, 태일이가 원하는 것은 노동조합 만드는 거였다고, 장준하 선생에게 들으니 신고필증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노조설립 신고필증을 내주지 않으면 장례를 치르지 않겠다고 했어요. 결국 그렇게 해서 노조가 설립되었죠.”

전태일의 분신이 학생과 노동자들의 분노 구심점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회유공작은 끈질겼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이소선을 안가로 연행해 6000만원이 든 통장과 동대문다방 영업권리 등을 들고 와 돈을 받는 대신 빨리 장례를 치르라고 종용했다. 이소선은 도장찍기를 강요하는 기관원들에게 ‘돈 액수가 안 맞는다’며 시간을 벌어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도망치기도 한다.

“한번은 감리교 김○○ 목사라는 사람이 노량진경찰서 형사들을 데리고 찾아왔어요. 오늘 자기와 합의를 보고 장례식을 하자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 목사냐고 물어봤어요. 진짜 목사도 있지만 가짜 목사도 있어요. 내가 말했습니다. ‘나보고 돈 받으라고요. 성경에 돈 받고 자식을 팔아야 한다는 구절이 어디 있소?’ 그렇게 물으니 ‘팔아야 한다는 구절은 없지만 성경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는 구원을 못 받는다’는 말은 있다고 답합디다. <요한복음> 어쩌고 하길래 ‘그 성경 구절은 거짓이요’라고 했더니 얼굴이 새파래지더라고요. 그러다 성질을 내면서 나를 잡아가려는 판이었습니다. 잡아가고 강제로 장례식을 할 판이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나님에게 물어봐라. 아들 팔아서 밥 먹고 사는 사람이 그게 사람이냐. 아들의 피와 살을 팔아서 밥 먹고 산다면 어떻게 에미라고 말하겠냐.” 그때부터 50년이 흘렀다. 세월이 흘렀건만 비난의 목소리는 매한가지다.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씨 기사엔 ‘시체팔이’라는 댓글이 달린다. 세월호 침몰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들 기사에 달린 비난도 마찬가지다.

“그동안은 전태일의 어머니, 노동운동과 실천에만 주로 포인트가 맞춰져 있지만 이소선의 삶이 한국사회에 던지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한석호 전태일재단 사무총장 직무대행의 말이다. “한국문화에서 자식이 먼저 죽으면 부모는 죄인입니다. 심한 말로 ‘자식 잡아먹은 XX’, 이런 식으로 자식이 죽으면 부모들이 움츠러들고 숨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당당하게 나선 겁니다. 1970년대에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입니다. 이게 80년대 열사 희생자들의 가족들로 이어져 유가협이 탄생했고, 세월호 가족도 나서게 되고 김용균 어머니도 나서게 된 겁니다. 가족들이 발언하고 행동하는 그 흐름의 출발점이 이소선 어머니였습니다. 그런 게 지금까지는 잘 부각되지 않았는데, 내년 10주기를 맞아 그 부분도 적극적으로 조명해보려고요.”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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