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과 함께 더 나은 일터를 꿈꿨던 김영문씨와 임현재씨
1960년대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은 지금과 달랐다. 1층은 판매 점포가, 2층과 3층은 봉제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건물 중앙의 복도 양옆으로는 칸막이로 분리해놓은 공장들이 빼곡했다. 2만여명의 노동자가 일했다고 하지만, 단합은커녕 대화하기도 힘들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사장이 운영하는 공장 소속이었다. 규모는 적게는 10명부터 많게는 60명에 달했다. 한숨 돌릴 틈이라곤 화장실에 가고, 점심시간 옥상에 오르는 때뿐이었다.
1968년 열여덟의 김영문은 평화시장 2층에서 재단사로 일했다. 전태일도 2층 공장의 재단사였다. “그 친구도 좀 아담한 편이고 나도 아담하고. 아주 순진한 인상의 친구였죠. 오가면서 알다 보니까 친구 하자, 이렇게 된 거예요.”
평화시장에서 만난 친구들
지방에서 올라왔고 가방끈이 짧다는 공통분모를 가진 이들은 죽이 잘 맞았다. 영문은 태일보다 두 살 어렸지만 서로 말을 놓고 지냈다. 태일이 말을 하고 영문이 듣는 편이었다. 태일은 근로기준법 책을 읽고는 이런저런 구상을 늘어놓았다. “그런 게 다 있냐?” 그때 영문은 근로기준법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태일과 동갑인 임현재는 그해 평화시장에 발을 들였다. 일어나서 밥 먹으면 공장에 나와 일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는 일의 반복이었다. 1970년 전태일이 몇몇 재단사들을 모아놓고 노동조건을 개선해보자고 제안했을 때, 현재도 그 자리에 있었다. 일만 하는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데 설렜다. “사람답게 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학교도 별로 못 다녀서 많이 배우지도 못했는데 무언가를 바꾸는 일을 할 수 있다니 가슴이 뛸 수밖에요.”
근로기준법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친구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스물둘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평화시장 앞에서 몸에 불을 댕긴 채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고 외치며 스러졌다. 앳된 청년들은 70대 노인이 됐다. 전태일 열사가 떠난 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11월 즈음이면 분주해진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친구의 말을 지키기 위해서다. 전태일 50주기를 앞두고 그와 함께 더 나은 일터를 꿈꿨던 김영문씨(70)와 임현재씨(72)를 만났다. 인터뷰는 각각 10월 31일과 11월 3일 전태일기념관에서 진행했다.
대학생 친구는 없어도
1965년 열일곱의 전태일은 평화시장에서 ‘시다(견습공)’로 일했다. 미싱 기술을 어느 정도 가진 터라 일을 빨리 배웠다. 시다에서 미싱보조, 미싱사로 직급이 높아지고 월급도 올랐다. 기술을 익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주변이 보이기 시작한 건 시간이 지나서였다. 어린 여공들이 겪는 고통이 눈에 들어왔다. 열세 살 남짓의 소녀들이 일당 70원을 받으며 14시간 넘게 일했다. 햇빛 한줄기 들지 않는 좁은 다락방에서 ‘미싱(재봉틀)’이 쉬지 않고 돌았다. 아버지와 일터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됐다.
태일은 영문에게 재단사 모임을 만들어 노동조건을 개선해보자고 제안했다. 1969년 6월 10명 안팎의 재단사가 허름한 중국집에 모여 창립총회를 열었다. 이름은 ‘바보회’라 불렀다. 전태일은 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살 권리가 있는데도, 여태껏 업주들에게 기계 취급을 받으면서도 바보처럼 찍소리 한번 못 하고 살아왔다고 했다. 그러니 재단사들의 모임은 바보들의 모임이라는 것이다.
태일은 같은 층에서 일하는 영문을 자주 찾아왔다.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요. 어떻게든 짬을 내 창문가에서 이야기도 하고 점심시간에 잠깐 보는 거지. 일을 똑같이 마치지 않으니 약속하고 만나는 것도 쉽지 않고요. 추석 한달 전이면 엄청 바빠서 밤일을 해요. 구정 때 돌아오면, 겨울옷은 장수가 안 나오기 때문에(하나 만드는 데 속도가 더디다는 뜻) 일이 더 많았던 거야. 어린 동심들, 한마디로 여동생 같지. 시다들을 보면서 그 친구 혼자 고뇌를 많이 한 거예요. 한번씩 ‘야, 우리가 공장을 하나 만들자’고 했어요. 직접 모범공장을 만들어서 사업주들에게 보여주자는 의도였어요.”
계획은 그럴듯했으나 돈이 없었다. 태일은 “왜 우리는 대학생 친구가 없냐”는 말을 많이 했다. 우선 대학생 친구가 있다면 한자가 가득한 근로기준법 책을 이해하기가 한결 쉬웠을 터였다. 게다가 대학생이라면 부모가 잘 살 것이므로 공장 차릴 돈을 빌릴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도 했다. 그는 “안구를 기증해서라도 돈을 구할 수만 있으면 좋겠다”, “두세명은 죽어야 개선이 되지 않겠냐”라고도 말했다. 영문은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냐고 받아쳤다.
바보회는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노동실태 설문조사지를 돌렸지만 회수율이 저조했다. 노동청 문을 두드려봐도 현실의 벽이 높았다. 봉제공장주들에게 밉보인 전태일은 해고됐고 바보회도 흐지부지됐다. 그는 1970년 9월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와 ‘삼동회’를 만들었다. 삼동은 평화시장, 동화시장, 통일상가를 말한다. 김영문과 임현재는 삼동회의 일원이었다. 임씨는 “나름의 정의감이 있었다”고 회상한다. “평화시장의 열악한 노동환경은 나도 잘 알고 있는 일이잖아요. 그건 잘못됐다, 잘못됐는데 어떻게 할 것이냐. 우리가 뭉치면 어느 정도 개선하는 데 기여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래 그거 할만하겠다, 해보자. 그래서 같이 적극적으로 하게 됐죠.”
전태일은 다시 한 번 노동실태 조사를 벌인다. 조사 결과를 토대로 노동청에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낸다. 이 소식이 신문에 보도되자 정부는 노동문제 개선을 약속한다. 하지만 약속은 번번이 무시됐다. 화가 난 삼동회 회원들은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일대에서 근로기준법 책을 불태우는 화형식을 기획한다. 시위 당일, 경찰이 한 건물에 모여 있던 삼동회 회원들을 막아서고 플래카드를 빼앗았다. 전태일은 친구들에게 ‘먼저 내려가라’고 했다. 그리고는 근로기준법 책을 가슴에 품고 내려왔다. 영문은 태일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몇 발자국을 뗐다. 갑자기 태일의 옷 위로 불길이 치솟았다.
영문은 태일의 쌍문동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를 병원으로 모셔왔다. 태일은 어머니와 친구들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꼭 이뤄달라”는 당부를 남기고 떠났다. 당시 현재는 밤에 청계천을 건너다 포장마차 리어카를 끄는 할머니와 부딪치는 사건에 휘말려 구치소에 있었다. 이튿날 친구들이 면회를 와 태일의 소식을 알려주었다.
청계노조와 어머니 그리고 오늘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아들과의 약속대로 하루 8시간 노동, 주일 휴가, 이중 다락방 철폐, 노동조합 결성 지원 등 8개 조항을 요구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기 전까지는 장례식을 치르지 않겠다고 했다. 정부가 거액의 위로금을 제시해도 끄떡없었다. 결국 노동청장은 노조 결성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전태일의 분신 2주 뒤인 11월 27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세워졌다. 이후 청계피복노조는 평화시장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유신정권의 노동탄압에 맞서 끈질기게 투쟁했다. 김영문·임현재 등 전태일의 친구 4명은 한 번씩 노조 지부장을 지냈다. 1981년 신군부가 ‘노동조합 정화’를 명목으로 노조를 강제 해산시켰다. 지부장이던 임씨는 이에 항의하다 옥살이를 했다. 이후 친구들은 각자의 길을 걸었다. 처자식과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일과 동료들을 위해 찌개를 끓이고 새벽예배를 가던 이소선 여사는 투사가 됐다. 행상을 하며 번 돈으로 동료들 뒷바라지를 했다. 임씨는 만나면 늘 ‘밥은 묵었냐’고 묻던 이소선 어머니를 떠올린다. “노동조합 초반에는 참여도가 굉장히 낮았어요. 사무실이 늘 썰렁했는데 어머니 생각에는 많은 사람이 한뜻을 모으면 뭐가 될 텐데 이게 왜 안 되나 싶으셨나 봐요. 나중까지도 ‘하나가 돼라’라는 게 어머니의 가장 큰 슬로건이었어요. 늘 노동자대회 현장이나 행사에서 마이크를 잡고 ‘하나가 됩시다’라는 얘기를 굉장히 많이 하셨죠.”
김영문씨는 “전태일이라는 친구가 있었기에 우리가 그래도 정신을 바짝 차려서 세상을 조금은 잘 살아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한다. 임씨도 “전태일 때문에 노동운동을 하고 정부, 사용자, 동료 노동자들과 관계를 이루고 무언가 만들어내는 멋진 일을 할 수 있었다”며 “그렇게 살다 보니 세계관이 넓어졌다. 그땐 참 괴롭고 힘들었지만 돌아보니 의미 있는 삶이었다”고 했다.
전태일과 함께한 친구들은 2020년 오늘을 두고 어떤 생각을 할까. “아마 전태일이는 ‘지금도 이렇지 않니’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김씨가 말한다. “우리나라가 세계경제 몇위권에 들어와 있다고 하는데 ‘아직도 많은 것이 잘못돼 있지 않니’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해주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 창신동에 가면 봉제공장이 많이 있어요. 그 안을 살짝 구경해보면, 물론 다락방은 철거되고 어느 정도 좋아졌지만 아직도 열악해요. 요즘 나는 택배노동자 뉴스를 보면서 (물건) 갖다주면 받을 줄만 알았지 그렇게 고생을 하는지는 몰랐어요. 노동환경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멀었구나 싶습니다.”
임씨도 택배노동자와 같은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의 얘기를 꺼낸다. “많이 버는 회사들은 분배를 어느 정도 잘해서 노동자의 삶도 괜찮아지면 좋겠는데, 점점 더 노동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형태의 노동시장이 생겨나고 있잖아요. 노동법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단결권이 법적으로 보장되지만 노동자들의 의식은 ‘지금 먹고살 만한데 노조 가입해서 조합비 내기 귀찮다’에 머무르는 건 아닌가 싶고요. 우리는 대부분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고, 그 권리를 잃지 않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려서부터 제도적인 교육, 건강하게 먹고살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두 사람은 50년간 자신을 필요로 하는 매 순간 빠짐없이 카메라 앞에 서고 마이크를 잡았다. 60주기, 70주기가 돼도 전태일에 대한 기억을 나눌 수 있을지 물었다.
“전태일의 삶을 내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먼저 간 친구의 생각 자체는 내가 알고 있는 한 전달을 해줘야 하지 않겠나 생각해요. 살아 있는 동안에,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는 한 누가 와도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김영문)
“1970년의 전태일이 지금도 외치고 있죠.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내가 못다 올린 덩이를 자네들이 굴려주게.’ 그럼 해야죠. 못다 올린 덩이 굴려가야죠.”(임현재)
<노도현 기자 hyun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