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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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사상가 안중근의 고뇌와 투쟁

한국 현대사에서 ‘10월 26일’은 총소리로 기억된다.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육군 중장 출신의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쏘았고, 그보다 꼭 70년 전에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은 일본제국주의의 설계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흔히 화약 냄새가 나는 사건들에는 정치적 상대주의가 작동한다. 한쪽의 영웅이 다른 쪽에서 역적으로 폄하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총리 스가는 장관 시절에 “안중근은 범죄자이고 테러리스트”라는 자국중심주의적 발언을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

안중근 지음·범우사

안중근 지음·범우사

그렇지 않다. 당시 국제법에 따르면 일반인도 의용군, 즉 군인이 될 수 있고 거듭된 강제조약이나 고종의 퇴위는 침략 행위로 인정된다. 무엇보다 대한제국의 주권자인 고종은 물러나면서 수수방관하는 국민이 되지 말라는 조칙까지 발표했다. 따라서 하얼빈역에서 울린 총성은 정당한 교전 행위의 일환이며 의거가 아니라 대첩으로 정정되어야 한다. 안중근 의사가 아니라 안중근 장군이 좀 더 그의 역사적 행위에 어울리는 작명인 것이다. 무엇보다 뤼순의 감옥에서 다듬은 ‘동양평화론’은 안중근이 민족주의자의 한계를 넘어 세계평화를 고민하는 사상가였다는 재발견의 희열까지 던져준다.

사격에 재능이 있어 사냥을 즐기던 평범한 젊은이가 어떻게 민족과 인류를 위한 역사적 기폭제로까지 진화할 수 있었을까. 영어의 몸으로 집필한 <안응칠 역사>

(<안중근 의사 자서전> 원제)라는 자서전이 실마리다.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을 때 그의 집안은 부유했고, 과거에 급제한 부친은 관리의 경력을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됐던 부친이 갑신정변의 회오리에 휘말려 꿈은 좌절되고 가문의 경제력도 줄어들었다. 곤경에 휩싸인 부친은 천주교의 도움을 받아 어려움을 벗어났고, 집안이 통째로 귀의했다. 안중근은 세례를 준 홍요셉 신부와 전도 활동을 다니면서 사랑과 평등의 윤리를 내면에서 발효시켰다. 동양의 ‘살신성인’과 서양의 ‘사해동포’라는 두 가지 밑거름이 어우러져 행동하는 사상가 안중근을 맺은 것이다.

국운이 몰락하면서 그의 고뇌는 깊어지고 동아시아 각국을 돌아다니며 계몽운동과 무장투쟁 등 다양한 해결책을 추구했다. 연해주 지방에서 300명의 대원을 이끌고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면서 붙잡은 포로를 만국공법에 따라 풀어주고 심지어 총기까지 돌려줬다. 물정 모르는 몽상가라는 비난 속에서도 원칙을 어길 수 없다는 것이 선비정신이요, 휴머니스트로서의 진면목이다. 숱한 패배와 좌절 속에서도 그는 생애 최고의 승리를 하얼빈에서 거두었다. 말과 행동이 일치된 고매한 인격은 법정과 감옥에서 광채를 발했고, 취조하던 검찰관과 옥리들까지 감화될 정도였다.

적까지 경의를 표하게 만든 언행의 원천은 무엇보다 할머니 조마리아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조카이자 김구의 맏며느리인 안미생은 증언한다.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라고 했던 어머니가 지어 보낸 수의를 입고 아들은 교수대에 올랐다. 지상에서 영원으로 향하는 그 순간, 안중근의 표정은 고요한 물이었다. 그 어머니가 그 아들을 만든 것이다.

<정승민 독서팟캐스트 일당백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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