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세월호 의인 김동수씨 그날의 기억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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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 사건을 만화로 재현한다는 것, 그것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도 너무나 많이 미디어에 노출돼 모두가 보았고, 알고 있다고 믿는 어떤 사건을 말이다. 9·11 테러 때 남편을 잃은 알리사 토레스는 자신의 경험을 담은 그래픽 노블 <미국 미망인(American Widow)>(알리사 토레스 글, 최성윤 그림, Random house, 2008. 국내 미번역)을 펴냈다. 토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9·11은 너무나 시각적인 사건이었어요. 글로 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어요. 그 이미지들을 어떻게든 해야만 했어요.” 월드트레이드 센터가 불타는 모습이 어떻게든 해야만 했던 이미지였다. 그를 뒤덮어버린 그 이미지를 제어할 방법이 바로 그날을 그리는 것, 그 이후 자신의 삶을 그리는 것이었다.

김홍모 작가가 딜리헙에 연재하고 있는 <홀>도 같다. 세월호 참사 생존자로 구출되기 직전까지 스무 명이 넘는 단원고 학생들을 소방호스로 건져내 ‘파란 바지의 의인’으로 불리는 김동수씨의 증언을 토대로 한 작품이다. 이 글은 <홀>과 같은 작품을 읽는 것의 의미를 새겨보려 한다.

참사 유가족 토레스나 참사 생존자 김동수씨 모두, ‘그날의 기억-이미지’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이는 대중에게도 마찬가지인데, 의미는 사뭇 다르다. 미디어를 통해 반복 재생산되고 대중에게 각인된 이미지, 그것은 참사의 스펙터클을 중심에 두고 있다. 사건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기능하며 역설적으로 사건의 실체와 맥락을 가린다. 불타오르는 건물과 침몰하는 배로 각인된 이미지가 너무 커서 사건이 발생한 경위와 사건 속에서 스러져간 사람들, 사건 이후 생존자들의 삶이 가려진다.

김동수씨에게 그 이미지는 그의 기억, 구체적인 대상들과 감각에 직결된 것이다. 그것은 세월호 선체 내부의 홀로 그를 빨아들인다. 그가 더 구하지 못하고 나와야 했던 그 홀,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라고 외치던 아이들이 남아 있던 그 홀. 거의 직각으로 기울어져 있던 선박에서 그 홀은 낭떠러지 아래 거대한 웅덩이였고, 김동수씨는 낭떠러지 위에서 소방호스로 사람들을 건져내고 있었다. 그가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온몸을 기울였을 그 낭떠러지 아래 공간, 그 홀과 거기 남겨진 사람들. 김동수씨에게 세월호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 사람들을 기억하는 일이었고, 그들을 구하지 못한 자신을 미워하는 일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음에도, 그것은 국가가 할 일이었음에도 그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자해를 하고야 만다.

<홀>의 1화와 10화에는 동일한 구도의 그림이 있다. 기울어진 세월호의 이미지로 떨어져 내리는 김동수씨다. 세월호 내부의 홀, 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듯이 그는 세월호의 기억-이미지로, 반복적으로 떨어진다. 파란 상의의 그가, 또 노란 상의를 입은 그가 떨어진다. 6년 내내 그가 떨어질 때, 가족과 생존자들이 그의 곁에서 그를 잡아주었지만 떨어지는 일만큼은 반복된다.

이 이미지를 어떻게든 하기 위해, 김홍모 작가의 <홀>은 이미지의 전후, 이미지 너머를 그려낸다. 김동수씨가 떨어지는 그곳으로 독자들을 부르기 위해, 그래서 함께 다시 올라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며, 따라서 재현-이미지를 경유해야만 한다. 참사를 가리는 참사 이미지의 마력에 저항해 그 이미지를 김동수씨가 보는 것처럼 보기 위해서다. 김 작가는 만화라는 매체를 소방호스 삼아 홀에서 한 의인을, 그처럼 괴로워하는 생존자들을 건져내려 하고 있다. 이 작업에 더 많은 사람의 눈길이 필요한 이유다.

김홍모 작가의 <홀> 중 한 장면 / 딜리헙

<조익상 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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