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방어선 ‘변호 받을 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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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빈을 변호할 변호인이 있을까요?” “있겠습니까? 요즘 같은 시대에 그랬다간 ‘종’칩니다.”

한 ‘직업별 익명게시판’에 올라온 문답은 파렴치범 변호를 꺼리는 법조인들의 속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여론을 뒷배 삼은 검찰을 상대로 승소 가능성도 낮을 뿐더러 사건을 맡은 법무법인이나 변호사에 대한 대중적 인식도 나빠져 수임에도 하등의 도움이 안 된다. 기피할 수밖에 없다.

텔레그램에서 성 착취물을 제작·유포한 혐의를 받는 조주빈이 탄 차량이 3월 25일 서울 종로경찰서를 나와 검찰 유치장으로 향하자 시민들이 강력처벌을 촉구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텔레그램에서 성 착취물을 제작·유포한 혐의를 받는 조주빈이 탄 차량이 3월 25일 서울 종로경찰서를 나와 검찰 유치장으로 향하자 시민들이 강력처벌을 촉구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25세 남성 ‘조주빈’은 한국을 뒤집어놨다. 조주빈은 이른바 ‘n번방’ 사건으로 불리는 동영상 제작 및 유포 사건의 용의자다. 텔레그램에서 ‘박사방’이라는 채팅방을 운영하면서 16명의 미성년자를 포함한 74명의 여성을 노예처럼 다루며 의사에 반하는 성적 영상을 제작하고, 영상을 유포하는 이 채팅방에 입장시켜주는 대가로 금전을 받은 혐의로 검거됐다. 혐의가 사실이라면, 여성을 인간으로 보지 않은 목불인견의 소행이다.

변호사들의 ‘파렴치범 기피 현상’에다 대중의 비난이 겹치면서 흉악범이나 파렴치범의 경우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는 동안에는 방어권이 사실상 무력화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변호인의 조력을 받고 싶어도 선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재판에 넘겨진 피고인에겐 국가가 변호인을 선임해주지만, ‘기소되기 전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는 피의자’는 스스로 변호인을 구하지 못할 때 국선변호를 받을 법적 근거가 현행법상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주빈은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한동안 변호인을 구하지 못해 혼자 조사에 임해야 했다. ‘변호사들 모두가 피의자 변호를 기피하는 경우’ 피의자가 홀로 수사기관 앞에 서게 되는 상황이 현실화된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이 ‘누구든지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한 때에는 즉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정하고 있는 만큼 이는 국회가 상정한 상황이 아니었다. 명백한 입법의 공백이다.
적어도 체포·구속된 피의자가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국선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퍼블릭 디펜더(public defender)’ 제도를 두고 있는 미국은 국가 주도로 피의자의 방어 변론을 맡는 변호사를 공무원으로 고용하고 있다. 일본은 ‘로테라스(Law-Terrace)’로 불리는 사법지원센터를 중심으로 형사공공변호 제도를 두고 있다. 역시 기소 이전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는 피의자가 지원 대상이다.

‘내 세금으로 흉악범을 변호해줄 필요가 있느냐’는 심정은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조주빈이 아닌 다른 사람을 피의자의 입장에 대입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제도는 조주빈이나 또다시 나올 흉악범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공권력 앞에 발가벗겨져 국가형벌권의 대상이 되는 국민이 보장받아야 하는 최소한의 방어선이다. 우리는 수사 단계에서 피의자의 방어권이 제대로 보장받지 못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재심으로 17년 만에 무죄가 난 ‘삼례 나라슈퍼’ 사건을 보며 뼈저리게 배웠다.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은 그 사회의 성숙도다. ‘변호 받을 자격’은 어느 누군가의 판단 대상이 될 수 없다. 범죄는 벼려진 칼날처럼 엄정하게 단죄되어야 하지만, 피의자마저 승복할 수 있는 공정하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야만 한다.

<백인성 변호사(KBS 법조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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