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클라쓰-‘일반적으로 혐오하는’ 시선에 대한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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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이태원 클라쓰>는 원작 웹툰과 드라마가 무척 닮았다. 둘 다 멋있고 깔끔하며 똑똑하다. 드라마가 원작을 존중했기 때문에 장점을 잘 이어받았다. 그러면서도 드라마다운 이야기를 위해 주요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축을 변경하고 사건의 선후를 조정했다. 드라마는 원작 웹툰이 더 긴 시간을 빠르게 달려가는 동안 굳이 설명하지 않았던 부분들을 채우려 애썼다. 인물됨과 관계가 만들어내는 서사의 개연성이 드라마에서 더 잘 납득된다면 그 덕분일 것이다.

광진 작가의 만화 <이태원 클라쓰> 중 한 장면 / 다음웹툰

광진 작가의 만화 <이태원 클라쓰> 중 한 장면 / 다음웹툰

그런데 개연성이란, 현실에 비추어 그럴듯하거나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는 독자·시청자의 현실에 대한 감각과 시각에 많은 부분 기댄다. 가령 <이태원 클라쓰>에서 교통사고로 사람을 죽이고서도 처벌받지 않은 재벌 장가의 행태가 그럴 법하다고 여겨진다면, 그것은 현실의 한국사회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감각이 수용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태원 클라쓰>가 웹툰과 드라마에서 인물됨을 달리 축조한 가장 자명한 예는 오수아다. 드라마의 수아는 고아로 보육원에서 자랐으며, 장가의 보육원 후원 책임자였던 새로이의 아버지와 오랫동안 친밀했다. 하지만 웹툰의 수아는 ‘대학 갈 형편은 아닌’ 옆집 친구이며 박새로이의 아버지와 오랜 인연을 맺지도 않았다.

이런 다른 설정을 염두에 두고 수아를 보면, 개연성을 위한 장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수아가 장가에 깊은 소속감을 가지고 성공을 지향하는 것, 그리고 새로이를 때때로 곤궁에 처하게 만드는 것은 웹툰에서라면 굳이 길게 따질 일이 아니다. 그저 그녀가 새로이와의 관계보다 스스로의 잘됨을 더 우선시하는 사람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아의 같은 행동이 드라마에서는 의미가 달라진다. 드라마의 수아는 새로이와 더 깊은 인연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웹툰보다 더 아슬아슬하게 ‘장가 사람’이고자 하는 수아의 선택을 지탱하는 개연성의 장치는 그녀가 고아라는 설정이다.

웹툰의 그녀는 그저 성공지향적인 사람이었지만, 드라마의 그녀는 고아 출신이기 때문에 성공지향적인 사람으로 이해된다. 웹툰은 그녀의 욕망을 설명하지 않지만, 드라마는 수아를 더 비중 있는 인물로 배치하면서 그녀의 성공 지향에 설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과연 이 판단은 <이태원 클라쓰>의 주제의식과 공명할까?

단밤 창립 멤버들은 한국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혐오하는’ 정체성 혹은 조건을 두루 가지고 있다. 전과자·소시오패스·트랜스젠더가 그것이다. 한국인을 자임하는 기니 출신 토니가 드라마에서 추가되면서 이 특징은 더 짙어졌다. 이러한 정체성을 지닌 인물들이 주인공과 함께 자유를 향해가는 <이태원 클라쓰>의 이야기는 정확히 그런 정체성에 대한 시선을 전복한다. “내 가치를 네가 정하지 마. 내 인생 이제 시작이고, 원하는 거 다 이루면서 살 거야.”, “네가 너인 것에 다른 사람을 납득시킬 필요는 없어.” 어떤 정체성도 혐오할 이유일 수 없고, 그 사람을 판단할 이유일 수 없다. <이태원 클라쓰>는 ‘일반적으로 혐오하는’ 정체성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그것에 기대는 일반적 개연성을 박살내는 이야기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수아에게 다분히 일반적인 개연성의 설정을 부여한 것 같은 드라마의 선택은 다소 아쉽다. 이 아쉬움을 섣부른 것으로 만들 드라마만의 이야기를 기대한다. ‘고아여서’, 혹은 ‘고아임에도 불구하고’가 아닌 수아이기 때문에 내린 선택이 시청자들을 납득시킬 수 있기를.

<조익상 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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