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12년 만에 세상에 나온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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뜯은 공책에 꾹꾹 눌러 쓴 진실… 사람은 가도 이야기는 남아

1993년 3월, 전남 광양군 진월면사무소. 이 마을에 사는 일흔살 남짓의 한 여성이 면장을 찾아왔다. 여성은 면장의 면담을 요청했다. 김문호 면장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봤다. 생활보호대상자로 면에서 지원하고 있는 정도인 할머니였다. 단둘이 되었을 때, 정도인은 막상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메인 목소리로 겨우 “좋은 데 취직한다는 말에 속아 정신대에 다녀왔다”고 말했다. 면장은 바로 그가 위안부 피해자임을 알아차렸다. 정도인은 가족들이 아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면장은 지금 얘기하는 것을 글로 적어오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정도인은 3일 만에 진술서를 가지고 왔다. 뜯은 공책에 꾹꾹 글씨를 눌러쓴 것이었다.
 

젊은 시절 형제들과 함께. 가운데 어두운 빛 한복이 정도인. / 정도인 조카 이기춘 제공

젊은 시절 형제들과 함께. 가운데 어두운 빛 한복이 정도인. / 정도인 조카 이기춘 제공

면장이 보관하다 조카 통해 접수

한국 정부는 1993년 6월 일제강점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을 공포하고 그해 8월부터 피해 등록 신청을 받았다. 그러나 이 소식이 광양까지는 닿지 않았던 것 같다. 김문호는 광양군은 물론 다른 곳을 통해서도 ‘위안부 피해자 정부등록’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1993년 12월 22일 정도인은 함께 살고 있던 조카 이기춘의 집에서 작고했다.

정도인은 세 자매의 맏언니이며 조카 이기춘은 막냇동생의 아들이다. 그는 이모가 제대로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재취 자리를 사는 것을 보고 이모의 과거를 추측했다. 그러나 한 번도 물어본 적은 없었다고 했다. 정도인은 가난했고 한쪽 눈도 실명한 상태였지만, 늘 옷을 단정히 입었고 자존심도 강했다. 그는 남편의 전처 자식들과 사이가 좋지 못해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보다 못한 조카가 이혼을 권유했다. 조카는 1986년 정도인이 이혼을 한 후에 자신이 양자가 되어 그를 보살피려고도 했다. 그러나 고모의 양자는 될 수 있어도 이모의 양자는 될 수 없다고 해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2005년 2월부터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강동위)에서 전국적으로 강제동원 피해신고를 받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전 진월면장 김문호가 조카를 불렀다. 그는 12년 전 정도인으로부터 받은 진술서를 조카에게 주며 피해신고를 해달라고 했다. 조카는 2005년 6월에 피해신고서를 작성했고, 이것은 2007년 9월이 되어서야 위안부 피해 조사관인 내 손에 들어왔다. 뜯긴 공책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고향은 하동군 하동면 신기리, 나이는 그때 16세.” “같이 간 사람은 노일만씨하고 그당시 아가씨들이 한 30명 잡혀갔다. 그때 당시에 부산 부둣가로 가서 여관에 다 감금을, 도망가지 못하게 감금했다. 어느 날 배에다 싣고 갔다.”

“나는 그 당시 (말레이시아) 세란고르란 데에 배치를 받았다.” “비행기 폭격에 내 오른쪽 눈을 다쳤다. 그래서 눈이 아팠다.” “해방이 되었다고, 일본 졌다 말하더라. 안전하게 차에 싣고 어딘가 모르게 싣고 가더라. 해방된 그 이듬해 3월에 나왔다.”

“남 보고 말 못 하고 겨운 심정 눈물겨워 다 쓰지 못하였고요. 나라에 이런 설움이 나서 이 가슴에 상처가 너무 크고요.” 광양군 선소리 이정 정도인


주변 사람들은 정도인이 글을 몰랐을 것이라고 했다. 조카는 김문호 면장이 대필했을 것이라고 말했고, 김문호는 정도인이 3일 만에 글을 써가지고 왔다고 했다. 나는 글을 보면 볼수록 정도인이 직접 썼다고 믿는다.

내가 광양에 가서 조카를 만나고 있을 때 정도인의 여동생 두 명이 우리 쪽으로 왔다. 조카는 이모가 끌려갈 때의 정황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동생은 당시 집안이 몹시 가난해서 언니가 1940년 무렵에 하동읍에 있는 여관에 가서 일했다고 했다. 1~2년 뒤에 소식이 끊겼다가 다시 1년 뒤에 일본말로 적힌 편지가 왔다. 남이 읽어준 내용은 취직자리가 있어 모집에 간다는 것이었고, 집안 식구들은 일본인가, 막연히 생각했다. 그리고 해방 후에 눈 하나를 잃은 언니가 돌아왔다.
 

두 여동생도 언니 사망 후에 처음 들어

동생들은 나와 조카가 나누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언니가 말레이시아 세란고르에 끌려갔던 것도, 폭격에 눈을 잃은 것도 나와 조카의 대화를 듣고 비로소 처음 알았다고 했다. 가족들은 정도인이 ‘위안부 피해자’로 인정돼 진실이 밝혀지고 그 한도 풀 수 있으면 더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했다.

2019년 8월, 조카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현재 공동묘지에 있는 정도인을 위안부 피해자들이 있는 천안 망향의 동산으로 옮길 수 있는지 물어봤다. 자신 또한 세상을 떠나게 되면 이모를 더이상 돌볼 사람이 없어 걱정이라고 했다. 정도인의 동생들도, 김문호 전 면장도 벌써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나는 이장 방법을 알아보다가 ‘평생 하동과 광양에서 살아온 정도인이 천안으로 가고 싶어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경남 지역에서 건립 준비 중인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상황을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가능하면 추모공원을 조성해 경남 지역 피해자들의 위패나 유골까지 모시기를 바란다고 한다. 관건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힘을 모아주느냐에 달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조카는 천안에 가기보다 경남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건립에 기대해 보고 싶다고 했다. 이모도 경남에 있는 것을 바라겠지만, 남은 가족들도 일상과 멀지 않은 공간 속에서 이모를 오래 기억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경남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은 2021년 건립 예정이다. 조카는 희망만 있다면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나 또한 볕 좋은 양지의 추모공원 안에 역사관이 건립되기를 바란다. 정도인의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 그곳에 가서 가족들이나 활동가, 또는 방문객들과 만나 하동에서 끌려간 정도인의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으면 좋겠다.

<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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