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엄마여서 미안해, 그렇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가족들이 피해사실을 알까봐 두려워했지만 평생 트라우마와 싸우며 삶의 의지 불태워

100년도 더 전에 신분제도는 무너졌지만, 여전히 부모 스펙이 자녀의 스펙으로 이어지는 시대다. 위안부를 겪어야 했던 엄마를 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2015년 8월 15일 방영된 <SBS스페셜>은 ‘엄마여서 미안해’라는 제목으로 피해자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룬 바 있다.

방송에는 위안부 피해자 김경순의 딸과 박옥련의 딸이 나온다. 딸들은 엄마가 한국정부에 피해신고를 하고 난 뒤 엄마의 이야기를 알았다고 했다. 김경순의 딸은 “엄마는 이상하게 불안증이 많았어요”라고 했다. 눈물부터 쏟아내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다 보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말문이 막혀온다. 이들의 이야기를 전하기에 말과 글은 너무나 앙상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날 이용수 할머니가 서울기림비 제막식에서 소녀상을 끌어안고 있다 / 이상훈 기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날 이용수 할머니가 서울기림비 제막식에서 소녀상을 끌어안고 있다 / 이상훈 기자

“엄마를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김경순과 박옥련은 1993년에 발간된 증언 1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에도 등장한다. 당시는 가명을 사용했다. 김경순은 “자식이 있고 남편이 있어 내 원통한 세월을 마음껏 통곡도 못한다. 내가 위안부로 갔다 온 사실을 사돈댁에서라도 알게 된다면 자식들 인생이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했다. 박옥련은 라바울에서 돌아온 뒤 “아이를 못낳을 것으로 생각해 소실로 들어갔는데 가자마자 애기가 생겼다. 떳떳하게 살지도 못하고 또 자식의 신세까지 망친 게 분하다”고 했다. 자식들 뒷바라지에 ‘별의별 짓’을 다하고 살았으나 “법적으로는 독신으로 되어 있다”고도 했다.

박옥련의 두 딸은 엄마가 나눔의 집에 입소한 뒤에야 피해사실을 알았다. 큰딸은 나눔의 집에서 조리사로 일하면서 ‘할머니’들의 식사를 챙겼다. 2011년 박옥련이 작고한 뒤 둘째딸은 나눔의 집의 요양보호사가 되어 할머니들을 돌봤다. “매일 할머니들을 보니 엄마가 없다는 생각도 안 들어요”라고 했다.

증언 1집의 김덕진은 우리에게 익숙한 위안부 피해자 그림인 ‘못다 핀 꽃’, ‘끌려감’ 등의 화가이기도 한 김순덕의 가명이다. 김학순의 증언을 보고 밤잠을 못자게 된 김순덕은 조카들에게 피해신고를 상의했다. 그러나 조카들은 “자식들이 충격을 받는다”, “아들 가슴에 못 박는다”는 이유로 신고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마음이 께름칙하고 통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신고를 했다.

김순덕의 이야기를 들은 큰아들은 “그렇게 험한 과거를 가지고 어머니 열심히 잘 사셨수, 장하우”라고 했다. 작은아들 부부는 맥을 잃고 비관에 빠졌다고 했다. 김순덕은 “아이들 모습을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하면서도 “그래도 내 마음은 정대협 모임에 쏠리고 있어 수요시위에 빠지지 않고 나간다”고 덧붙였다.

<SBS스페셜>에 김순애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피해자의 본명은 이수산이다. 2008년에 공개된 다큐멘터리 <끝나지 않은 전쟁>에서는 본명 이수산으로 나온다. 당시 그는 처음에는 촬영을 망설이다 일본이 책임을 부정한다는 소리를 듣고 카메라를 똑바로 보며 “촬영하세요! 나는 살아있어요” 하고 소리친다. 그러나 2015년의 <SBS스페셜>에서는 다시 가명을 쓰고 모자를 쓰는 조건으로 출연했다. 이수산은 어느 때고 망설이기는 했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

나는 2002년 9월 증언을 채록하기 위해 박순희를 만났다. 한 정대협 활동가는 박순희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극히 꺼린다며 면담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위안부 피해여성들과 함께하는 ‘제주도 인권캠프’에서 박순희와 ‘짝꿍’이 되었다. 박순희는 어릴 적 이름이 나와 같다며 반가워했다. 여행 내내 박순희는 유쾌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박순희가 갑자기 과거 이야기를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나는 허락을 받고 허겁지겁 녹음기를 꺼냈다. 함경남도 원산에서 나고 자란 박순희는 만 18세인 1941년 겨울 집 근처 밤거리에서 끌려갔다. 친구네를 가던 길에 골목에서 맞닥뜨린 낯선 남자 2명이 “야 이리 와봐”라고 불렀다. 그리고 일본인집이 밀집된 어느 곳에 사흘 동안 감금됐다.

박순희는 중국 헤이룽장성 미산(密山) 소재 위안소로 보내져 4년을 지냈다. 함께 살자고 감언이설을 했던 군인이 돌변해서 박순희를 칼로 찔렀던 순간을 얘기할 때는 갑자기 주루룩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그 트라우마를 다 헤아리지 못하겠다는 낭패감이 들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죽을 때까지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박순희는 해방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여동생을 우연히 만났다. 동생 또한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고 한다. 술 중독자가 되어 있는 동생을 보고 박순희는 입을 꼭 다물고 있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집에 돌아온 후 박순희는 집안 중매를 통해 결혼도 했다. 그런데 임신이 되지 않았다. 대신 한국전쟁으로 피난생활을 하던 당시 갓난쟁이를 얻어 귀하게 길렀다.

피난길에 얻은 아기 귀하게 길러

부산에서 지낼 때 우연히 같은 위안소에서 지냈던 친구를 만나 얘기를 나누었는데, 남편이 그 모습을 보고 박순희의 ‘과거’를 알아버렸다. 남편은 가출해 딴살림을 차렸고 2남1녀를 낳았다. 박순희는 아이들의 법적 엄마가 됐고 이들을 실제로 보살폈다. 박순희는 “남편은 자신을 속인 죄인을 한 대 때리지도 않은 착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날의 이야기는 여기서 그쳤다. 이후 내가 다시 집에 방문했을 때 박순희는 매우 반겼다. 차려준 밥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여동생과 지인들이 방문했다. 순간 박순희는 매우 불안해하며 나보고 얼른 가라고 했다. 그게 마지막 만남이었다. 전화를 해도 싫어했고 증언집에 구술을 싣는 것도 허락지 않았다. 굳이 구술을 싣겠다면 ‘김떡빨’이라고 이름을 바꾸라고 했다. 구술은 결국 미완인 채로 남았고 증언 6집에는 싣지 못했다. 변호사인 조카, 너무 착한 아들,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에게 폭로될까 두렵다는 박순희를 더 이상 설득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정대협과 꾸준히 연락했다. 2006년에는 일본 오키나와의 위안부 추모비 건립 행사에 참석해 증언하기도 했고, 2010년에도 몇 개의 행사인가에 나가 증언을 했다. 모두 본명을 썼고 언론에 얼굴을 노출하기도 했다. 박순희가 본명으로 공개증언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자랑인 조카, 얻어 키운 착한 아들, 직접 키운 법적 자식들, 모두의 엄마로서 박순희의 삶이 응답을 받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박순희를 생각하면 달변과 침묵, 유쾌함과 우울함, 너그러움과 예민함을 넘나들며 평생 트라우마와 싸워온 피해여성의 삶의 의지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 삶의 여정에서 두려워했던 ‘폭로’보다도 진심에 대한 응답을 마주한 것 같아 마음이 좋다. 박순희는 2012년 8월 작고했다.

<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알려지지 않은 위안부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