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지독한 고독, 그러나 회복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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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쓸쓸히 생을 마감한 할머니들의 회복은 세대를 넘어 확장해야

2018년 8월 14일, 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행사가 열리는 충남 천안 망향의 동산에 있었다. 먼저 입장한 대통령 부부가 나중에 들어온 피해생존자 세 분을 반갑게 맞았다. 환영의 박수가 쏟아지고 서로 눈을 맞추며 인사하는 중에 곽예남이 대통령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6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을 맞이 세계연대집회 1348차 정기수요시위’에서 한 참석자가 일본의 공식사죄를 요구하는 부채를 들고 있다. / 권도현 기자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6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을 맞이 세계연대집회 1348차 정기수요시위’에서 한 참석자가 일본의 공식사죄를 요구하는 부채를 들고 있다. / 권도현 기자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갑자기 예전에 전남 함평에서 만난 곽복례가 떠올랐다. 당시 그는 몹시 고독했으며,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동시에 경계하는 82세의 여성이었다. 곽복례는 곽예남과 같이 1925년생 소띠에, 전남 출신에, 만주 봉천에 끌려갔던 위안부 피해자다. 곽복례가 살아 있었다면, 그래서 고운 옷을 입고 국가 행사에 초청되고 대통령 얼굴도 쓰다듬을 수 있었다면 조금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을까. 그 순간 곽복례가 보고 싶었다.

이장이 대신 신고한 ‘가엾은 곽복례’

2006년 3월 22일, 나는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강동위)에 피해신고를 한 곽복례를 조사하기 위해 함평을 방문했다. 마을 이장이 곽복례가 살고 있다는 큰 기와집으로 안내했다. 그는 3년 전에 작고한 동거인 남자의 집을 관리해주며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인기척이 들렸겠지만 곽복례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러 번 부르자 경계하듯 조심스럽게 모습을 보였다. 어색하게 굳은 얼굴. 치과에 가고 싶었는데 동사무소에서 오늘 사람이 오니 어디 가지 말라고 해서 집에 있던 참이라고 했다. 그러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던 얼굴은 아니었다.

곽복례는 귀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지쳐 있어 어쩐지 황폐한 느낌이 들었다. 피해신고도 직접 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온 마을 사람들이 곽복례가 ‘만주에 갔다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가엾은 곽복례’를 돕기 위해 이장이 대신 신고를 해준 것이라고 했다. 이날 나와 곽복례의 면담은 뒤죽박죽이었다. 서로의 말들이 엉키거나 흩어질 뿐이어서 도무지 접점이 생기지 않았다. 문밖에서 몰래 듣고 있던 마을사람이 “몸 뺏긴 말을 해야 돈을 받지”라고 끼어드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면담은 그대로 끝이 났다. 내가 돌아간다고 하니 곽복례는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뭔가 몹시 부끄러웠다.

4월 19일, 조용히 곽복례의 집을 다시 찾았다. 서로 어색하게 앉아 있다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는 곽복례를 꼭 끌어안고 귀에 입을 대고 말을 건네고 있었다.

1925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곽복례는 5살 때 아버지를 잃고 광주의 작은아버지 집으로 보내졌다. 형편이 어렵지는 않았는데 작은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뒤 작은어머니의 구박이 심해졌다. 1940년쯤 15살이 되던 해에 낯선 남자 둘이 찾아와서 “같이 가자”고 했다. “지금 안 가면 나중에 순사가 잡아간다”는 말도 덧붙였다. 광주역에서 ‘처녀 4명’이 출발했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처녀 3명’이 합류했다. 봉천의 위안소에 갈 때까지 인솔자가 두 번 바뀌었다고 했다. 이 때문에 곽복례는 누가 자신을 끌고간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이후 봉천에서 안후이성 벙부(蚌埠)로 보내졌다. 위안소에서 곽복례는 군인이나 업주에게 자주 맞았다고 했다. ‘말을 잘 안 듣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전쟁이 끝나고 모두 뿔뿔이 흩어지는 와중에 곽복례는 조선인들 틈에 섞여 장시성 난창(南昌)으로 갔다. 서로 먼저 귀환선을 타려고 경쟁하는 가운데 곽복례는 첫 번째 배를 탈 수 있었다. 승선자 이름을 부를 때 얼른 대답했다고 했다. ‘김혜자’라는 이름이었다. 곽복례는 “남의 이름을 뺏어 갖고 왔어”라고 말했다.

엄마가 살고 있는 목포 집을 찾아갔으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다. 곽복례는 곧바로 집을 나와 혼자 여기저기 떠돌며 살았다. 1990년대 초반 함평에 들어와 다 쓰러져가는 집을 얻어 살고 있었는데 같은 마을의 ‘여씨 할아버지’가 같이 살자고 했다. 밥도 해주고 살림도 해줬다. 2003년 ‘여씨 할아버지’가 작고한 후 곽복례는 다시 혼자 남았다. 가끔 ‘여씨 할아버지’의 자식들이 ‘자기 집’을 보러 오는데, 거짓말이라도 인사치레 한 번 안 한다고 곽복례는 서운해했다. 따로 마을사람에게 들은 얘기로는 곽복례가 곧 쫓겨날 처지라고 했다.

경계심 강했던 ‘오키나와의 할머니’

곽복례는 2006년 5월 강동위에서 위안부 피해자로 인정받고 그 뒤 여성가족부의 생활안정지원대상자로 등록됐다. 나는 그가 계속 그 집에 살고 있는지, 마을사람들과 잘 지내고 있는지 늘 궁금했다. 그러나 언제 한 번 보러 가야지 생각만 하고 있다가 2006년 11월 12일 그가 작고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오키나와 도카시키 섬의 위안소에 끌려갔던 배봉기는 종전 후 폐허의 오키나와에 남아 홀로 방랑하며 살았다. 늘 신경통과 두통에 시달렸으며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강했다. 무국적자로 떠돌던 배봉기는 1975년, 오키나와에 계속 살기 위해 자신이 과거 ‘위안부’였음을 밝혀야 했다. 1972년 오키나와의 시정권을 회복한 일본 정부가 종전 전에 일본에 입국한 사실이 확인되는 조선인에 한해서만 특별체류를 허가했기 때문이다.

배봉기는 한동안 일본 언론에 무자비하게 노출돼야 했다. 야마타니 데츠오 감독의 기록영화 <오키나와의 할머니>(1979)에는 이즈음의 배봉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람을 경계하면서도 감독의 방문에 희미하게 반가운 빛을 보이는 배봉기의 표정에서 곽복례의 얼굴이 겹쳐졌다.

가와다 후미코는 10년 가까이 배봉기의 이야기를 듣고 1987년 <빨간기와집: 조선에서 온 일본군 위안부>라는 책을 펴냈다. 머리말에서 가와다는 책을 쓰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봉기씨가 걸어온 인생이 너무나 처절해서 젊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오키나와의 김현옥·김수섭 부부는 문전박대를 당하면서도 1975년부터 꾸준히 배봉기를 찾아갔다. 함께 온천도 가고 고기도 구워 먹는 일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일상의 관계 속에서 배봉기는 “아지매가 그렇게 된 것이 팔자 탓이 아니라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탓이고,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탓”이라는 말도 들었다. 1989년 1월 히로히토 일왕이 숨졌다는 뉴스를 보고 배봉기는 “왜 사죄도 안 하고 죽었느냐”고 말했다. “원수를 갚아 달라”고도 했다. 처음 자신을 만나러 온 사람들에게 “일본이 전쟁에 져서 분하다”고 한 배봉기였다. 배봉기는 김현옥 부부와 교류하면서 지병인 두통의 주기도 더뎌졌다고 했다.

곽복례를 생각하면, 나는 언제나 마음이 묵직하다. 2006년의 내가 부끄럽기만 할 뿐이다. 그럼에도 최대한 솔직하게 이 이야기를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피해자 앞에서 부끄럽다거나 두렵다거나 머뭇거리고 싶은 마음을 넘어서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생을 마감했어도 피해자를 회복시키는 관계망은 세대를 넘어 확장돼야 한다. 우리는 기억으로 연결되어 있다.

<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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