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우리에게 아직 ‘동화의 나라’가 남아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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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잘 잊는다. <우산 타고 날아온 메리 포핀스>에서 어른들은 재미있는 일들은 다 잊어버리고 재미없는 세계에서 살아간다. 다 잊어버린 게 어른들의 책임은 아니다. 어른으로서 변명을 하자면 살아내느라고 바빠서 잊었다.

책꽂이에 책들이 넘치자 바닥으로 내려와 쌓이기 시작했다. 두고 볼 수 없어 책 정리를 하다가 구석에 숨어 있던 <우산 타고 날아온 메리 포핀스>(1934)를 발견했다. 아이가 어렸을 적 사준 동화책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엄마가 방문판매 책장수에게 샀던 어린이문고로 처음 읽었다.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져있는 어린이들 / 경향자료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져있는 어린이들 / 경향자료

어린 시절의 나는 요즘 아이들보다 심심했던 것 같다. 해가 지면 밖에 나가기 어려워 텔레비전으로 저녁시간 어린이 방송을 보았다. 그러고 나서 너무 심심하면 문고판 동화책에서 아무거나 골라 방구석에 박힌 채 읽은 책을 또 읽었다. 줄리 앤드류스와 딕 반 다이크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우산 타고 날아온 메리 포핀스>는 그 가운데 특히 자주 읽었던 책이었다.

어린 시절의 좋은 추억을 떠올리며 책을 읽어가다가 이내 그 시절로부터 아주 먼 길을 왔다는 걸 알아버렸다. 어렸을 때는 주인공 소녀와 소년인 제인과 마이클에 감정이입을 했다. 메리 포핀스가 불러내는 마법에 마음을 빼앗겼다가도 뭘 물어봐도 대답을 하지 않는 메리 포핀스가 불만이었다. 이제는 복잡한 어른들의 사정에 눈이 먼저 갔다.

다시 읽는 책에서 얻는 새로운 경험

메리 포핀스는 뱅크스 부인에게 고용된 유모다. 그런데 뱅크스 부인의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소개장도 없이 내키는 대로 오고, 고분고분하다기보다 ‘흥’ 하고 콧방귀를 자주 뀌고, 쉬는 날은 본인이 정하고, 그러다 하늬바람이 부는 날에 인사도 없이 떠난다. 아이 돌봐주는 사람이 그렇게 갑자기 그만두면 얼마나 난감한지 어린 내가 알았을 리 없고, 메리 포핀스가 갑자기 떠난 게 슬프기만 했다.

그녀의 애인 버트는 성냥팔이 사나이다. 날씨가 좋으면 길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그림 구경 값을 받는다. 메리 포핀스를 만난 날은 고작 2펜스를 번다. 버트는 메리에게 점심 사줄 돈이 없다며 미안해하더니, 그럼 그림 속으로 들어가자며 메리 포핀스의 손을 잡아끈다. 푸른 들판에 선 둘은 어느새 멋진 옷을 차려입고, 나무 뒤에 있어 그림엔 보이지 않았다는 웨이터의 시중을 받으며 우아한 식사를 한다.

이건 현실의 반대편이다. 어른의 눈은 이 근사한 판타지에서 현실의 결핍을 본다. 고용인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피고용인 유모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가난한 거리 화가가 품는 판타지로 읽으니 <우산 타고 날아온 메리 포핀스>는 서글픈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아무래도 작가인 파멜라 린든 트래버스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재봉사, 무용수, 배우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는 지은이 소개를 읽은 탓이었다. 어려서 읽은 책에 그런 작가 소개가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읽었더라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책을 다시 읽으며 처음엔 보지 못한 경험을 하는 건 종종 있는 일이다. 책이 변해서가 아니라 보는 눈이 변해서다. 그렇지만 다 큰 어른이라 해도 책을 덮을 수가 없었다. 메리 포핀스의 삼촌은 생일 때문에 생긴 웃음가스로 공중을 붕붕 떠다니고, 메리 포핀스와 아는 사이인 빨간 소는 뿔에 박힌 별 때문에 계속 춤을 추고, 사람 모습을 한 하늘의 별이 폴짝거리며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다. 어린아이의 눈이나 나이든 이의 눈이나 <우산 타고 날아온 메리 포핀스>에서 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현실을 뒤집어버리는 판타지는 동물원에서 절정을 이룬다. 한밤의 동물원에서는 우리에서 나온 동물들이 사람의 말을 하며 일을 하고 있다. 인간 할아버지의 등에는 의자가 얹혀 있고 여덟 마리의 원숭이가 타고 있다. 할아버지는 원래는 동물이 사람을 태운다는 제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한다. 바다표범은 제인과 마이클에게 먹고 싶지 않은 오렌지 껍질을 줄 테니 다이빙을 해보라고 사납게 이야기한다.

“이곳 짐승들은 모두 밀림의 자식들이고, 너희들은 도시의 자식들이지. 하지만 우리를 이루는 근본은 모두 똑같아. 머리 위의 나무, 발 밑의 돌멩이, 새, 짐승, 별, 모두…. 우린 모두 하나이고, 모두 같은 곳으로 가고 있어. 얘들아, 이다음에 나를 잊게 되어도 이 사실만은 잊어서는 안 된다.”

동물 나라의 왕인 인도 코브라가 혀를 날름거리며 제인과 마이클에게 하는 말이다. 트래버스는 인간과 동물의 자리를 바꾸는 것만으로 무엇이 훼손되고 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동물원에서 훼손되고 있던 것은 모든 생명들이 누리는 각자의 동등한 우아함이었다.

세월이 흘러 또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

인도 코브라가 말을 하는 책을 읽은 아이들이라면 모든 생명에 깃든 각자의 우아함을 못본 척하기는 어렵다. 어렸을 때 읽었던 많은 동화책의 주인공들은 사람이기도 하고 벌레이기도 하고 두꺼비이기도 했다. 또 사랑에 빠졌고 모험을 떠났고 기뻐했고 슬퍼했다. <우산 타고 날아온 메리 포핀스>의 인도 코브라는 아이들에게 이다음에 커서도 우리는 모두 하나이고 모두 소중한 존재라는 걸 잊지 말 것을 당부한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어느새 어른이 된다.

시공주니어

시공주니어

어른들은 잘 잊는다. <우산 타고 날아온 메리 포핀스>에서 어른들은 재미있는 일들은 다 잊어버리고 재미없는 세계에서 살아간다. 다 잊어버린 게 어른들의 책임은 아니다. 어른으로서 변명을 하자면 살아내느라고 바빠서 잊었다.

“몰랐어? 누구한테나 자기만의 동화의 나라가 있는 거야.” 어디 갔다 온 거냐는 제인과 마이클에게 메리 포핀스가 말한다. 이쯤에 이르러 어른의 서글픈 눈이 부끄러워진다. 아이들을 돌보는 유모는 대단한 마법사로 세상에 모르는 게 없다. 가난한 거리 화가는 놀라운 세계를 품고 있는 그림을 그린다. 푼돈을 받고 새 모이를 파는 할머니는 광장의 새를 모두 자기 치마 속에 재운다. 그러니 누구도 허투루 보지 말 것. 대단한 세계를 품지 않은 삶은 없다. 어른들의 복잡한 세계에서 살아가더라도 이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게 이 동화책에 대한 독후감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지금 내겐 나만의 동화의 나라가 아직 남아있는 걸까. 오십에 이른 나이에 동화의 나라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작가인 트래버스는 경제적으로 어려워 이 동화를 썼겠지만, 그런 이유 말고도 동화의 나라에 대한 믿음은 잃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삶이 언제나 먹고사는 문제만은 아닐 거다.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기에 나이 든 내가 다시 <우산 타고 날아온 메리 포핀스>에 빠져들었던 건 아닐까.

슬그머니 <우산 타고 날아온 메리 포핀스>를 다시 책꽂이에, 어른들의 복잡한 세계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예순이 되면 다시 한 번 꼭 읽어봐야겠다고 말이다.

<성지연(국문학 박사·전 연세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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