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이제 겨우 반고비, 너의 삶이 말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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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이 되니 그 삶은 이미 켜켜이 쌓인 지층이 되어 있다. 나는 아직 나의 소명을 찾지 못했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한다. 오십은 너무 늦은 나이일까. 아니, 이제 겨우 반고비를 지나며 할 말은 아니다.

버클리대학을 떠나 파머가 적을 두었던 퀘이커 학습생활공동체 펜들 힐. /pendlehill.org

버클리대학을 떠나 파머가 적을 두었던 퀘이커 학습생활공동체 펜들 힐. /pendlehill.org

우리 나이로 오십이 됐다. ‘백세 시대’에 딱 반으로 꺾어지는 나이다.
풋풋한 시절 문학을 공부할 때 만난 책 가운데 하나가 김현의 <반고비 나그네길에>다. “한뉘 나그네길 반고비에 올바른 길 잃고 헤매이던 나….”
김현이 인용한 단테의 <신곡> 첫 구절이다. 김현은 <신곡>의 ‘나’가 “바로 나인 것 같은 느낌을 지울 길이 없어” 제목으로 빌려 왔다고 한다. 단테에게 반고비란 칠십 인생의 절반인 서른다섯이다. 이제 나 역시 백세 인생의 오십이니까 ‘반고비 나그네길’에 들어섰다는 느낌을 지울 길 없다.

지혜와 평화 대신 회의와 불안이

<신곡>과 <반고비 나그네 길에>를 읽었던 그 시절엔 빨리 반고비에 도달하고 싶었다. 상처투성이인 젊음이 싫었던 걸까. 뜨거웠던 시대가 무거웠던 걸까. 어서 나이가 들어 마음의 평화와 인생의 지혜를 갖고 싶었다. 그 후 이십여 년이 빠르게 흘러갔다. 사회생활을 일찍 접고 주부로 십여 년을 살았다. 딸아이는 어느새 어른이 됐다. 그런데 반고비를 맞은 지금 외려 마음은 스산해졌다.

내가 꿈꾼 지혜와 평화 대신 마음속에는 회의와 불안이 일었다. 사회로 돌아가야 할 터인데, 그 길은 희미해져 잘 보이지 않았다. 회의의 시선과 불안의 마음은 그래서 수없는 질문을 던진다. 난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야 할까.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나야 하는 걸까.

어두운 숲속에서 길 잃은 단테를 안내한 이는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에게 끊임없이 물으며 지옥과 연옥을 여행해 천국의 입구에 도달한다. 그러면 나의 베르길리우스는 누구일까. 사회생활을 접었어도 책은 계속 읽었다. 반고비 나그네 길에 내 곁을 지킨 베르길리우스는 책이었다. 나는 책에게 묻고 또 듣는다.

그 첫 번째 안내자는 파커 파머의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2000)다. 파머는 미국의 교육자이자 사회운동가다. 책을 펼치면 “한밤중에 깨어나 ‘지금 내 삶이 정말 내가 원하던 것일까’를 물으며 잠을 설쳐본 적이 있는 사람들에게”라는 헌사가 희망처럼 튀어나온다. 내게 거는 말 아닐까. ‘오십, 길을 묻다’에 이보다 더 알맞은 출발은 없다.

이 책의 원제는 <너의 삶이 말하게 하라(Let your Life Speak)>다. 파머가 속해 있던 퀘이커 공동체의 오랜 경구다. 파머는 젊은 시절 존재가 삶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가 한참 들어서는 삶이 존재를 이끈다는 반대의 결론에 도달했다. “당신이 삶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기 전에, 삶이 당신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에 귀 기울여라.” 나이 든 파머가 다시 해석한 ‘너의 삶이 말하게 하라’다.

파머의 책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한문화

파머의 책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한문화

파머의 삶은 모험의 연속이었다. 자신의 소명이 목사라고 확신해 신학대학을 들어갔지만 중퇴했다. 이어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을 밟았지만 학계를 떠나 커뮤니티 조직가가 됐다. 그리고 다시 퀘이커교 생활-학습 커뮤니티인 펜들 힐로 옮겨 활동했다. 그런데 어느 날 파머는 펜들 힐 근처 대학 캠퍼스로 산책을 나갔다가 예전에 만났던 전임 학장의 초상화와 마주했다. 파머를 학교 이사회에 임원으로 채용하려고 버클리로 찾아왔던 사람이었다.

학장은 파머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보였다. “대체 당신은 뭘 하고 있는 거요? 왜 시간을 낭비합니까? 너무 늦기 전에 자기 길로 돌아가시오!”

초상화를 본 파머는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 그 순간이었다. 파머는 자신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두려움과 마주하게 됐다. 파머가 대학을 떠났던 것은 대학이 싫어서가 아니라 학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 두려움은 학계를 떠나 다른 길을 선택하게 했지만, 그 길 위에서 자신이 인생을 낭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두려움을 만났다. 두려움은 눈물로 터졌다. 눈물 속에서 파머는 자기 안에 놓인 어둠과 비로소 마주했다. 어둠으로의 추락의 다른 이름은 우울증이었다.

파머는 어떻게 어둠으로의 추락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파머에게 다가온 것은 어둠이 곧 빛이라는 영적 깨달음이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없는지와 고통스럽게 대면했다. 삶이 존재에게 말을 거는 순간이었다. 자신의 본성을 파악하고, 그 본성이 능력과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게 되는 그 순간, 비로소 새로운 빛이 보였다고 파머는 말한다.

한계를 인정하는 순간 새로운 빛 보여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처음부터 이것을 깨달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세상이 내게 허용한 것과 내가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길을 찾을 때, 이 깨달음은 그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음은 얻기 쉽지 않다. 파머의 말처럼 삶이 말을 걸어올 때 거기에 귀를 기울여 필사적으로 찾아야 한다.

파머는 본성을 존중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려 할 때 길이 닫힌다고 말한다. 바로 그 자리에서 자기의 본성, 가능성과 한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길이 닫힐 때 불가능을 인정하고 그 경험이 주는 가르침을 발견해야 한다고 파머는 조언한다. 또한 길이 열리면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인정하고 응답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닫힌 문 두드리기를 그만두고 돌아서기만 하면 뒤쪽에 있는 다른 문에 다다른다. 그러면 넓은 인생이 우리 영혼 앞에 활짝 열려 있다.” 파머에겐 닫혀 버리는 문들 때문에 고민하던 바로 그 자리가 자신의 세계가 활짝 열리는 자리였다.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는 작지 않은 위안을 준다. 하지만 위안이 곧 용기가 되는 건 아니다. 어둠이 빛이 된다는 것에 확신을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둠이 빛으로 가는 여정인지는 빛으로 나와 봐야 알 수 있다. 길이 닫힐 때 나머지 세상이 열리는지는 세상이 열려야 확인할 수 있다. 현재의 고난이 깊을수록 자책의 어둠은 짙어지고 그 깊은 어둠 속에서 길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파머는 답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신의 삶을 통해 파머가 보여주는 소명에로의 여정은 내게 길을 비춘다. 파머가 답이 있는 곳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답이 있는 곳은 내게 오롯이 남는 단 한 자리, 나의 삶이다. 오십이 되니 그 삶은 이미 켜켜이 쌓인 지층이 되어 있다. 나는 아직 나의 소명을 찾지 못했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한다.

위안이 파머의 몫이라면, 용기는 나의 몫이다. 파머의 충고대로 나의 삶에 귀를 기울인다. 오십은 너무 늦은 나이일까. 아니, 이제 겨우 반고비를 지나며 할 말은 아니다. 새로운 길을 나서려는 나는 스스로에게 용기를 선물해야 한다.

<성지연(국문학 박사, 전 연세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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