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부 기피신청이 늘어나는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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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에 기피를 신청하는 사례가 날로 늘어나고, 법원행정처 요직에 올랐던 전직 고위 법관마저 기피신청을 낸 이유는 뭘까. 답은 간단하다. 법원에서 공정한 재판을 진행한다는 신뢰가 무너져서다.

“당신 같은 판사에게 재판 못 받겠소.”

평범한 변호사들 사이에서 형사소송법 제18조는 사실상 ‘없는 조문’으로 통한다. 제18조는 법관이 불공평한 재판을 할 우려가 있는 경우 재판 당사자가 ‘다른 법관에게 재판받겠다’고 법원에 신청할 수 있도록 한, 이른바 ‘기피(忌避)신청’을 규정한 조항이다. 국민들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려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당사자의 권리구제제도 중 하나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구속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 5월 30일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연합뉴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구속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 5월 30일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연합뉴스

1954년 형사소송법 제정 당시부터 있던 조항이지만 그동안 법조계에서 사용된 적은 많지 않다. 법원의 불편부당함을 정면으로 부정한다는 점에서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기실 일종의 ‘터부’이자 사문화된 조항이었다. 분에 못 이긴 의뢰인의 강권에 못 이겨 마지못해 기피신청을 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적어도 변호사가 먼저 “판사 기피신청을 하자”고 의뢰인을 이끄는 예는 드물었다. 이는 ‘법관이 공정한 재판을 할 것’이라는 신뢰가 법조계 저변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신뢰’는 통계상으로도 나타난다.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동료 판사가 불공정한 재판을 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는 판사는 많지 않다. 지난 2009년부터 2018년까지 10년간 민·형사재판을 통틀어 재판부 변경 신청이 들어온 건 총 8353건이지만 이 중 실제로 재판부가 바뀐 건 11건에 그친다. 0.13%다. 그나마도 판사가 심리 중에 피고인의 유죄를 예단하거나 피고인에게 모욕적인 언사 혹은 진술 강요, 피해자와 친소관계, 증명되지 않은 사실을 언론에 발표하는 등 노골적으로 한쪽 편을 든 경우 정도다.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0(제로)’에 수렴하는 기피신청이지만, 이상하게도 최근 신청 건수가 늘었다. 심지어는 사법부의 핵심이라는 ‘법원행정처’에서 고위 법관까지 지낸 인사가 후배 판사의 불공정성을 우려한다며 기피신청을 내기도 했다. ‘사법농단 의혹’ 관련 직권남용 등 혐의로 구속돼 재판에 넘겨진 임종헌 전 대법원 법원행정처 차장 얘기다. 과거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는 당시 정권의 입맛에 맞춰 진행되던 재판의 절차와 결과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의혹의 핵심으로 의심받고 있는 임 전 차장은 5월 13일 재판부가 자신의 구속영장을 추가로 발부하자 “재판부가 유죄 선고 예단을 가지고 있다”며 A4용지 106페이지 분량의 기피신청 사유서를 제출했다. 그는 사유서에서 재판부 기피신청의 이유를 ‘담당 재판부인 형사합의36부 재판장인 윤종섭 부장판사 때문’이라고 적었다. 임 전 차장 측은 “추가 구속영장을 발부하는 과정이나 공판·증인심문 기일지정 등 재판 진행 과정, 증인심문 과정에서 소송지휘권을 부당하게 남용하고 피고인의 방어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했다”면서 “어떻게든 피고인을 처단하고 말겠다는 오도된 신념 내지 사명감에 가까운 강한 예단을 가지고 재판 진행을 했다”고 주장했다.

올 들어 법원이 기피신청을 받아들이는 확률이 갑자기 올라간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국민들이 법원에 기피를 신청하는 사례가 날로 늘어나고, 법원행정처 요직에 올랐던 전직 고위 법관마저 기피신청을 낸 이유는 뭘까. 답은 간단하다. 법원에서 공정한 재판을 진행한다는 신뢰가 무너져서다. 더 이상 형사소송법 제18조는 ‘없는 조문’이 아니게 됐다.

<백인성 변호사(<머니투데이> 법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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