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부도의 날> 외환위기 벼랑 끝 전술 ‘모라토리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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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속 경제] <국가부도의 날> 외환위기 벼랑 끝 전술 ‘모라토리엄’

모라토리엄이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지자체)가 외부에서 빌린 돈에 대해 일방적으로 만기에 상환을 미루는 행위다.

우스갯소리가 있다. 1억원을 빌리면 돈 빌린 사람이 돈을 못갚을까봐 잠을 못자는데, 100억원을 빌리면 돈 빌린 사람이 돈을 못갚을까봐 은행이 잠을 못잔다고 한다. 질문이 있다. 만약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한국이 채무를 당분간 못갚겠다며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더라면 어떠했을까. 그랬더라면 간담이 서늘해진 채권사들을 움직여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협상을 이끌어 낼 수 있었을까? IMF의 요구로 금융시장을 개방하면서 한국은 아시아의 자동입출금기(ATM)로 변했다. 장기간 고금리 긴축정책을 쓰면서 알짜 우량기업이 대거 무너져 헐값에 해외 투자자들에게 팔려 나갔다. 반면 말레이시아는 투기자본 규제와 자본유출 통제로 맞섰다. 결과적으로 말레이시아는 한국과 같은 기업도산, 서민경제 위축, 높은 자살률 등을 피해 갔다.

최국희 감독의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 분)의 입을 빌려 묻는다. “IMF에 자금지원을 요청하느니 채무 지급유예 선언이라도 해야 합니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3명의 등장인물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1997년 초반 경기호황이 지속되던 때 한시현 팀장은 연말 외환 부족 가능성을 정부에 보고한다. 금융시장에서 이상징후를 느낀 증권맨 윤정학(유아인 분)은 사표를 내고 역베팅을 결심한다. 한국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리 없는 소규모 제조업체 사장 갑수(허준호 분)는 대형백화점의 어음 거래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며 빚을 내 납품을 시작한다.

국가부도의 날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 대책반 내부에서 위기대응 방식을 놓고 의견이 엇갈린다. 재정국 차관은 IMF행을 요구한다. 반면 한은의 한시현 팀장은 국가 자산을 담보로 자산유동화증권(ABS)을 발행하거나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자고 맞선다.

모라토리엄이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지자체)가 외부에서 빌린 돈에 대해 일방적으로 만기에 상환을 미루는 행위다. 라틴어로 ‘지체하다’는 의미인 ‘morari’에서 유래됐다. 돈을 안 갚겠다는 게 아니라 ‘갚고는 싶은데 돈이 없으니 기다려 달라’는 얘기다. 특정 정부가 빌린 돈을 못갚겠다고 뒤로 넘어지면 현실적으로 돈을 회수할 방법이 없다. 전쟁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급해지는 곳은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이다. 이들도 어디선가로부터 자금을 조달했기 때문에 대출금 회수가 막히면 먼저 파산위험에 몰릴 수 있다. 타국 금융기관이 대출해 준 것이라면 위험은 제3국으로 전이된다. 때문에 특정 국가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면 국제금융 안정을 위한 응급조치로 국가 간 채무조정작업(rescheduling)에 들어간다. 채무삭감, 이자감면, 상환기간 유예 등의 협상이 진행된다. 모라토리엄은 프랑스에서 시작된 제도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엄청난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자 모라토리움을 선언했다. 최근 사례를 보면, 1982년 멕시코와 브라질이, 1998년 러시아가, 2008년 두바이가 각각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아예 돈을 갚지 못하겠다고 선언한다면 디폴트(default)다. 2001년 아르헨티나, 2008년 에콰도르가 선언했다.

모라토리엄과 디폴트는 돈을 약속한 기한 내 갚지 못한다는 ‘부도선언’이기 때문에 사실상 국제금융거래가 끊긴다. 신용등급이 폭락해 자금조달이 어려워지고 환율은 폭등한다. 한 번 깨진 신뢰로 추후 신용을 회복하기도 어렵다. 벼랑 끝 전술이긴 하지만 상당한 리스크가 뒤따른다는 얘기다.

당장 달러가 없으면 에너지와 식량을 수입할 수 없는 한국으로서는 모라토리엄 선언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있다.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지 않은 것은 관료들이 배짱이 없었던 탓일까, 아니면 정확한 현실 판단이었을까.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복기’는 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박병률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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