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하버드에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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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사회 ‘교사’로서의 랍비 예수

한 해의 끝자락에 크리스마스가 놓여있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늘 다사다난으로 귀결되는 세모이지만 그래도 신은 인간을 잊지 않고 있다는, 판도라의 희망처럼 아기예수를 내려보냈다고 멋대로 위안해본다. 신이 인간으로 육화한 이야기는 매력적이지만 당혹스럽다. 오른뺨을 맞거든 왼뺨도 내밀고, 원수를 사랑하고,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머리에서 심장까지 가려면 평생도 모자라지 않을까 싶다.

<예수 하버드에 오다><br />하비 콕스 지음·오강남 옮김·문예출판사·2만원

<예수 하버드에 오다>
하비 콕스 지음·오강남 옮김·문예출판사·2만원

그런데 2000여년 전 예수의 행적이 오늘 우리가 당면한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선행학습’이 된다는 목소리가 있다. 20세기 10대 신학자로 손꼽히는 하비 콕스는 하버드대학에서 ‘예수와 윤리적 삶’이라는 강좌를 개설해서 학생들이 겪거나 겪게 될 도덕적 딜레마를 예수의 생애와 활동을 통해 논의해왔다. 그 결과물로 나온 책 <예수 하버드에 오다>는 예수를 당시 유대 사회의 율법을 연구하고 실생활에 적용하는 교사 랍비로서 파악한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는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이나 다윗과 같은 유대의 주류 인물과 연결된다. 흥미롭게도 마태복음에서는 네 명의 여인도 거론한다.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해서 예수의 조상이 된 베레스를 낳은 다말, 예언자 가계의 모태가 된 기생 라합, 다윗의 조상을 낳은 이방인 룻, 솔로몬을 출산한 헷 사람(밧세바)이 그들이다. 가장 소외되고 멸시받은 여성뿐만 아니라 성탄을 축하하러 온 동방박사에 대한 기록 또한 의미심장하다. 아기 예수가 유대의 왕손뿐만 아니라 이방인과도 이어지고 여인까지 포용하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존재임을 선포하는 것 같다.

출생부터 약자와 이(異)문화에 개방적인 예수는 40일간 광야에서 시련과 수련의 시간을 가진다. 돌을 빵으로 만들고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보라거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주겠다는 악마의 시험과 유혹은 위협적이고 강렬하다. 왜 예수는 신적 능력을 발휘하지 않았을까. 인간이 기적의 노예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는 풀이가 있지만 흔쾌하지는 않다.

콕스는 예수가 치른 시험을 확실한 결과에만 집착하고 타인의 인정을 받겠다는, 그리고 할 만큼 다했다며 책임을 떠넘기는 인간의 욕망과 비교한다. 자연과 사회의 거센 폭력은 언제든 사람을 깨뜨릴 수 있기에 눈에 보이는 기적을 요구하는 것은 본능적 열망과도 같다. 2006년 이탈리아에서 가톨릭 신도들의 청원 기도 대상을 살펴보니, 예수는 2%, 성모 마리아는 9%인 반면 공중부양 등 초능력으로 유명했던 한 신부가 압도적 비중을 차지했다는 조사결과도 이를 방증한다. 실제로 예수의 활동 초기 사람들이 결사적으로 따랐던 까닭도 병에서 낫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예수는 선전하지 않는다. 조용히 앓는 이들을 고쳐서 다시 사람들과 어울려 살게 만든다. 외경스러운 메시아가 아니라 사람의 아들로서 윤리적 삶이 단독비행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존재가 ‘교사’로서의 랍비 예수였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를 위해서, 특히 친구 없는 약자들과 끝까지 함께 하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의 길을 걷는다고 할 수 있겠다.

<정승민 독서팟캐스트 일당백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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