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선녀전-누군가를 살리려 1000년을 달려온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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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선녀전>은 이 마음의 환생을 목표로 한 것만 같은 작품이다. “나와 남이 다르지 않고 강 건너와 이곳이 같은 곳임을 느끼고, 하늘과 땅이 두 개가 아니라 하나임을 의식할 때”를 지금 우리에게 선물하려는 작품이다.

돌배 작가의 만화 <계룡선녀전>의 한 장면. | 조익상 만화평론가네이버웹툰

돌배 작가의 만화 <계룡선녀전>의 한 장면. | 조익상 만화평론가네이버웹툰

영화 <본 슈프리머시>에 대한 정희진 선생의 해석을 좋아한다. 영화 도입부에서 제이슨 본은 자신이 국가의 명령에 따라 죽였던 무고한 이들의 딸에게 찾아온다. 자신을 죽이려는 국가기관의 감시와 추격을 피해가며 찾아와 만난 소녀에게 본이 한 일은 ‘사과’였다. 그는 소녀의 부모에 대한 진실을 전하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했다. 이 사과에 대해 정희진은 이렇게 썼다. “이 영화에서 부모를 잃은 소녀는 주인공의 잘못을 모른다. 그런데도 그는 깊은 죄의식에 젖은 채 소녀가 부모를 좋게 기억할 수 있도록 사과한다. 바로 옆사람에게 하는 사과가 아니다. 그는 목숨을 걸었다.”(정희진, ‘사과하기 위해 목숨을 걸다’)

이런 목숨을 건 사과에 필적하는 마음을 한 웹툰에서 만났다. <계룡선녀전>(돌배 작가, 네이버웹툰)에서다. 현재와 과거뿐만 아니라 신선계와 인간계를 오가며 길고 먼 시공간을 한 이야기 속에 담아내는 작품인 만큼, 그 마음을 논하기 위해서는 겹쳐진 이야기들을 조금 풀어둘 필요가 있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의 만화적 변주

작품은 현재를 배경으로 시작한다. 생물학과 교수 정이현은 박사과정 연구원 김금의 초대로 김금의 고향 계룡산에서 추석을 함께 쇠기로 한다. 고향집에 도착하기 직전 ‘선녀다방’이라는 조금 이상한 커피숍에서 바리스타 할머니가 내려준 ‘사슴의 눈물’이라는 이름의 커피를 마신 뒤 다시 길을 나서지만 둘은 왠지 모르게 길을 잃고 만다. 어딘지 낯익은 돌계단을 발견한 김금은 역시 속으로 기시감을 느끼는 정 교수와 함께 그 길로 들어선다. 그 길 끝 폭포에서 둘은 선녀와 조우한다. ‘선녀다방’ 바리스타 할머니가 목욕을 하려고 머리를 푸는 순간 돌연 젊고 어여쁜 선녀로 변해버린 것이다.

어딘가 낯익다면 틀리지 않다. <계룡선녀전>은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의 만화적 변주를 한 축으로 하는 이야기다. 바리스타 할머니이자 선녀인 선옥남은 699년 전 이 폭포에서 목욕을 하다 나무꾼을 만나 아들 딸 둘을 낳고 함께 살았다. 다만 옛이야기처럼 사라진 날개옷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무꾼은 과거 옥남과 함께 북두성군을 모시던 선인 바우새의 환생이며, 그를 연모한 옥남은 날개옷에 신경쓸 겨를도 없이 인간세상에서 함께 살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옛날이야기의 사슴은? 물론 등장한다. 역시 함께 북두성군을 모셨던 이지가 환생해 사슴이 되었고, 날개옷을 훔친 것도 바로 이지였다. 파군성 바우새, 거문성 이지, 탐랑성 선옥남. 이 세 선인의 긴 인연이 현대에 다시 이어지는 이야기가 <계룡선녀전>의 골자를 이룬다. 그러니까, 선옥남과 만난 김금과 정이현은 다른 두 선인의 환생인 것이다. 누가 누구인지는 나중에야 밝혀지지만.

뻔하디 뻔한 삼각관계를 담은 이야기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한때 유행한 ‘남편 찾기’일 듯도 하지만 그것도 아니다. 삼각관계나 남편 찾기는 모두 연애관계를 모든 다른 관계에 우선시되는 중핵으로 삼지만, <계룡선녀전>은 모든 의미의 관계와 인연을 중시한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과거 부부·가족의 연과 동료의 연, 인간을 비롯한 동식물 사이의 관계 모두가 귀한 것으로 부각된다. 겉으로는 판타지 로맨스 장르인 것 같지만 잘 살펴보면 범생태계 로맨스다. 물론 이때의 로맨스는 연애관계의 사랑이 아닌, 좀 더 큰 의미의 사랑이다. 이를테면 사람이 연꽃을 사랑해 애정과 물을 주고 연꽃이 그를 위해 꽃을 피우는 것 같은.

이런 사랑(들) 속에서도 내가 특히 인상 깊었던 그 마음을 논하기 위해서는 699년 전보다 더 이전의 이야기를 거쳐야만 한다. 기아가 들끓던 시절, 어느 마을에서는 한 아이를 희생하기로 한다. “이지는 가족이 없으니 그 아이를 바칩시다.” 선인이 되기 전의 이지가 서낭당에 버려져 굶어 죽어가던 때, 한 여인이 달려오고 있었다. 잠시 전만 해도 부엌에서 도토리를 까던 여인이다. “부엌에서 도토리를 까던 그 여인은 갑자기 서낭당에 버려진 그 여자아이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아닌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고 곧 그 상상이 자신의 고통으로 변해버렸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 안아버린 여인은 아이에게 도토리죽을 먹이기 위해 허겁지겁 달려갔다. 하지만 아이는 세상에 한을 품고 원망과 증오의 불길 속에서 이미 죽어버렸다.

남의 일을 자신의 일로 껴안는 것

“나와 남이 다르지 않고 강 건너와 이곳이 같은 곳임을 느끼고, 하늘과 땅이 두 개가 아니라 하나임을 의식할 때” 사람은 선인의 세계로 들어선다고 작품은 남두성군의 입을 빌려 말한다. 그 여인은 타인을 구하기 위해 달렸지만 구하지 못했다. 살리지 못했기에 살릴 수 있을 때까지 그 여인은 달렸다. 시간을 거슬러, 윤회를 계속하며. 이지가 선인이 되었을 때 여인도 선인이 되었다. 그 생에서도 여인은 이지를 살리려 애썼다. 그가 바우새다. 이지가 사슴으로 환생했을 때 여인도 사람으로 환생했다. 그때도 여인은 이지를 살리지 못한 것을 아파했다. 그가 나무꾼이다. 이제 이지도 여인도 모두 사람으로 환생했다. 여인은 이지를 이 생에서도 살리려 한다. 그가 OO이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 마음이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1000년을 거슬러 달린 마음. 작품은 환생을 거치며 그 마음을 실천한 특정 인물을 통해 그 마음을 형상화하지만, 사실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진 마음이다. 뒤집어 말하면 그 마음은 사람이 실천할 때 환생해 이어지는 것이다. 남의 일을 자신의 일로 껴안는 것. <계룡선녀전>은 이 마음의 환생을 목표로 한 것만 같은 작품이다. “나와 남이 다르지 않고 강 건너와 이곳이 같은 곳임을 느끼고, 하늘과 땅이 두 개가 아니라 하나임을 의식할 때”를 지금 우리에게 선물하려는 작품이다.

이미 많은 스포일러를 써버리고 말았지만, 그 마음을 살려내려는 작품의 노력들은 이 짧은 글로는 다 담아내기 힘들 만큼 많다. 발랄한 유머와 사랑스러운 그림체 덕에 작품에 빠져들고 나면 이 깊은 마음이 어느 순간 느껴진다. 종이컵을 쓰지 않고 막사발과 텀블러에 커피를 담아 내는 장면도, 커피 속에 빠진 날파리를 건져내 날려보내는 장면도 그 속에 담긴 마음이 귀하다. 늘 혼자 명절을 보내는 정이현을 고향집으로 초대해 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김금의 그 마음도 마찬가지다.

이 아름다운 만화를 보다가 눈을 돌려 세상을 보면,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찾게 된다. 내게서 네게서 우리에게서. 분명 우리는 찾을 것이다. 이미 우리가 기나긴 세월을 거쳐 쭉 가지고 있던 마음이니 말이다. 우리는 아직 그 마음을 잃지 않았다.

<조익상 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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