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색깔=꿀색, 백인사회에 입양된 이방인의 성장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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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 에낭은 작품을 통해 서양인도 동양인도 될 수 없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 자신을 버린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배신감, 생물학적 어머니에 대한 호기심(다행히 원망은 없었다)을 간직한 채로 성장기를 지내왔다.

대중문화 상품이 현실의 문제점에 새롭게 관심을 두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영화나 드라마 한 편 혹은 방송 한 회, 소설 한 권이 이전까지 몰랐던 사실을 알려주거나, 새롭게 깨닫게 하고, 나아가 미흡했던 자신의 관심을 보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소설 <도가니>는 당시에 크게 주목 받지 못했던 광주 인화학교 교직원들이 청각장애 아동을 대상으로 벌인 성폭행 사건을 세상에 크게 알렸고, 이후에 작품이 영화화되면서 대중의 관심은 더욱 확장되었다. 영화 <내부자들>은 정경유착의 실상을 파고들어 900만 관객에게 공개했고, 얼마 후 국정농단사태를 통해 우리는 그것이 상상의 영역이 아니었음을 확인했다. 최근 영화 <택시 운전사>나 <1987>은 민주화 과정의 비극을 다시 상기시켰다. 방송사마다 제작하고 있는 사회 고발 프로그램이나 많은 다큐멘터리 필름은 이런 관심을 본격적으로 요구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벨기에의 만화가 융 에낭(한국명 전정식)의 만화 <피부색깔=꿀색>의 한 장면. |길찾기

벨기에의 만화가 융 에낭(한국명 전정식)의 만화 <피부색깔=꿀색>의 한 장면. |길찾기

벨기에로 입양된 작가의 이야기

대중문화 장르인 만화 역시 다르지 않다. 의료행위와 인간의 존엄을 고민하는 사토 슈호의 <헬로우 블랙잭>은 일본 의료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상세히 지적하며 결국 현실에 변화를 주었고(이 작품은 몇 년 전 작가가 저작권을 포기하며 무료로 서비스되고 있다), 1992년 퓰리처상을 받은 아트 슈피겔만의 <쥐>는 유대인 대학살을 고발하는 만화사의 걸작으로 여겨진다. 타가메 겐고로의 <아우의 남편>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이성애자들의 오해를 따뜻하게 들추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최규석의 웹툰 <송곳>이 많은 이들에게 비정규직 문제에 좀 더 관심을 쏟는 계기로 작용했다. 또한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한 만화 작품집 <십시일반>, <사이시옷>, <어깨동무>는 우리 사회의 약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양한 관점에서 전달하고 있다. 모두 소개할 수는 없지만 언급된 작품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좀 더 세상에 관심이 생길 것이다.

벨기에의 만화가 융 에낭의 자전적 이야기 <피부색깔=꿀색>도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작가의 다른 이름은 전정식이고, 그의 기억 혹은 기록에 의하면 5살의 나이에 부모 없이 서울의 거리에서 지내다 홀트아동복지회의 도움으로 벨기에로 입양되었다. 그는 해외입양아로서, 백인사회의 이방인으로서, 백인 다수 가족의 구성원으로서의 성장과정을 진솔함과 유머를 가득 담은 만화로 그려냈고, 이후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해 앙시 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자그레브 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등에서 수상했다. 해외입양은 어쩌면 무거운 주제일 수도 있지만, 작가는 이 작품이 밝고 긍정적이며, 나아가 입양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성공적인 것 같다. 나는 이 만화를 읽는 동안 몇 장면을 제외하면 대체로 키득거렸고, 만화를 모두 읽은 뒤에는 해외입양에 대해 많은 것을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지금까지 나는 해외입양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입양에 대해 아이에게 더 좋은 성장환경을 제공한다는 긍정적인 면만 쉽게 떠올렸다. 물론 여기에는 한국 사회에 대한 불신과 피로감이 크게 작용했다. 주변에서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싶다는 말을 듣곤 하는데, 자신이 선택하는 것과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 간과했다. 더해서 미디어에 보도된 입양아들의 성공신화를 지나치게 일반화했던 것도 같다. 프랑스 가족에게 입양된 장뱅상 플라세(권오복)가 프랑스의 상원의원이 되었다고 매스컴이 한껏 띄웠던 적도 있었고, 플뢰르 펠르랭(김종숙)이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 되었다는 소식도 기억난다. 단지 몇 개의 좋은 결과만 보고 나는 한참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 해외입양의 40%가 한국 출신

만화 <피부색깔=꿀색>을 통해 본 입양아동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물론 그들의 삶이 마침내 성공적으로 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삶이란 그리 단순하게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을 소홀히 생각한 것이다. 융 에낭은 작품을 통해 서양인도 동양인도 될 수 없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 자신을 버린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배신감, 생물학적 어머니에 대한 호기심(다행히 원망은 없었다)을 간직한 채로 성장기를 지내왔다. 그리고 그것들을 해소하거나 피하는 수단으로 만화를 그렸고, 그 경험이 쌓여 마침내 작가가 될 수 있었다. 내가 이 만화를 읽지 않았고, 온라인 기사로 소식을 접했다면 그를 이렇게 기억했을 것이다. ‘좋은 벨기에 가정에 입양되어 자신의 꿈을 이루어 낸 만화가(또는 애니메이션 감독)’라고. 다행히 작품을 읽었고, 누군가는 죽음보다 괴로운 입양생활을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여운이 남았다. <피부색깔=꿀색>으로 나는 해외입양 문제에 관해 관심이 생겼고, 이후에 많은 사실을 새롭게 혹은 정확히 알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해외입양은 2차 대전 이후 시작되었는데 지금까지 50만명 정도가 새로운 부모를 만났다. 그 중 20만명이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인데, 알고 있더라도 놀라운 수치다. 지금까지 전세계 해외입양인구의 40%가 한국에서 보내진 것이었다. 그 원인을 한국전쟁의 후유증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2000년대에 다다를 때까지도 한국의 해외입양인구는 세계 1위였다. 현재는 많이 줄어든 상황이지만 여전히 많은 아이를 다른 나라에 입양 보내고 있다. 저출산 해결이 국가적 과제로 쉼 없이 언급되는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관련 연구들을 보면 한국의 해외 입양아동이 많은 원인을 민족주의, 부계혈통주의, 가부장제, 편리한 제도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는 혼혈아동(전쟁 중에 미군과 한국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이 대부분이다)을 아버지의 나라로 보내는 정책을 추진했고, 여전히 핏줄을 중시하는 문화로 국내입양이 부정적이며, 가부장제와 호주제의 영향으로 미혼모가 아이를 키우기 힘들었고, 사회적 시선도 곱지 않았다. 이런 배경에서는 해외입양이 대안이 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입양이 편리한 한국의 제도도 큰 몫을 했다. 다른 국가들의 경우 입양을 원하는 부모가 아동이 태어난 나라에 일정 기간 머무르며 심사를 받아야 하지만, 한국은 서류만으로 쉽게 아이를 선택하고 입양할 수 있다. 이는 많은 문제를 암시하고, 결국 터졌다.

1977년 미국으로 입양 간 팀(모정보)은 이태원에서 노숙자로 발견되었는데 미국의 양부모는 그를 거절했다. 1979년 미국에 입양된 아담 크랩서(신성혁)는 양부모의 학대를 받으며 자랐는데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시민권조차 발급 받지 못해 결국 한국으로 추방되었다. 당연히 한국말도 한국문화도 모른 채로. 같은 이유로 필립 클레이(김상필)도 한국으로 추방되었다. 그는 한국에서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아파트 14층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했다. 이 기사들을 차례로 보면서 해외입양이 그들에게 새로운 좋은 환경이 될 거라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나 반성했다.

누군가는 대중문화가 대중을 우매하고 통제하기 쉬운 대상으로 만들기 위한 도구라고 주장했다.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대중문화를 제공하고 이것을 동력으로 다시 현실에 안주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많은 대중문화 상품은 제법 그 이론에 잘 들어맞았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깨어 있는 작가의 작품을 통해 현실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세상을 바꾸어야 할 동기를 제공 받을 때도 있다. 아마도 <피부색깔=꿀색>이 그런 작품이고, 이런 작품이 더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황순욱 초영세 만화 플랫폼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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