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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설야(1968~ )

마을버스에서 내린
맹인 소녀의 지팡이가 허공을 찌르자
멀리, 섬에서 점자를 읽고 있던 소년의 눈이
갑자기 따가워지기 시작한다

도다리가 잠든 횟집 앞
무거운 책가방을 든 소녀가 휘청거리며 지나간다
오른손에 움켜쥔 지팡이가 갈라진 보도블록을

탁! 탁! 칠 때마다 땅속 벌레들의 고막이 터진다

허공 어딘가 통점을 꾹. 꾹. 찌르며
헛발 딛는 소녀의 종아리가 되어
집을 찾아가는 지팡이

무수한 길들이
종아리 속에 뻗어 있다

맹인 소녀의 지팡이 소리가 우렁차다. 허공을 찌르고 길을 두드린다.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소년에게로, 땅속 벌레들에게로 뻗어나간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세상을 두드려 길을 내는 지팡이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탁! 탁!

<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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