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소리>-신문은 그 시대 아버지들의 권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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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아버지들이 확보하고자 했던 가장의 권위만큼이나 그들의 손아귀에서 언제나 활짝 펼쳐져 있었다. 신문에 새겨진 활자의 무게는 그 시대의 아버지들이 어깨에 짊어진 책임의 무게와도 같았다.

어린 시절, 매일 새벽마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종이신문이 배달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현관문을 열면 언제나 바로 손이 닿을 만한 거리에 회색의 종이뭉치가 있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비닐에 포장된 채로 어떻게든 꾸역꾸역,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집어들고 나면, 단순한 종이라고 하기에는 부담스러울 만큼 무거웠다. 그것은 아마도 활자의 무게였는지도 모른다. 한자로 가득하고, 또 세로쓰기 방식이어서 가독성도 떨어지는 그 활자들은 저마다 자신의 무게를 과시하고 있었다. 어린 나는 읽기가 힘들었고 읽을 수도 없었다. 윤전기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그것의 냄새는 갓 따낸 과일처럼 싱그러웠고 어딘가 고소하기도 했다. 살아서 꿈틀대는 그 종이뭉치를 들고, 나는 아버지에게 갔다.

권위와 불통의 매개체로 신문 선택

종이신문은 아버지의 것이었다. 신문을 가지는 동안 나는 그것이 구겨질세라 조심스럽게 그날의 4컷만평을 들추어 보곤 했다. 신문을 훼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가 유일했다. 그때 아버지는 대개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았고, 나는 문을 두드려 신문을 전해주었다. 아침식사를 하러 올 때도 아버지는 신문을 들고 와서 식탁 앞에 앉았다. 밥을 한 숟갈 먹고 신문을 보고, 다시 국을 한 숟갈 먹고 신문을 보았다. 가끔은 한숨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혀를 차는 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가족에게 어떤 내용인지 알려주거나 동의를 구한다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신문을 마저 읽은 아버지는 양복을 입고 나타나서 출근을 했다. 그때 비로소 신문은 다른 가족의 것이 되었다. 내가 보는 것은 우선 4컷만평이었고, 그 다음에는 TV편성표였고, 마지막이 스포츠란이었다. <동아일보>의 ‘나대로 선생’이라는 만평은 우선 만화라서 좋았고, TV편성표를 볼 때면 마치 보물을 찾는 기분이었다. 삼성 라이온즈가 어떤 경기를 했는지도 궁금했다. 나의 1980년대 말과 90년대 초 아침은 아버지에게 종이신문을 배달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아버지가 두고 간 종이신문을 읽는 것으로 끝났다. 그 시대의 아버지들은 가정으로 배달되는 활자·정보를 선점하고 독점하는 주체였다.

조석 작가의 만화 <마음의 소리>에서 선물을 주는 대신 인사로 때우려는 아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아버지가 선택한 행위가 '신문보기'로 나타난다. / 네이버웹툰

조석 작가의 만화 <마음의 소리>에서 선물을 주는 대신 인사로 때우려는 아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아버지가 선택한 행위가 '신문보기'로 나타난다. / 네이버웹툰

웹툰 <마음의 소리>의 작가 조석은 나와 같은 1983년생이다. 그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마음의 소리>는 1980년대 초반에 태어난 그 세대가 가질 법한 세대성을 언제나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작품의 등장인물은 조석의 주변인들, 그러니까 가족과 친구들이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초반에는 전형적인 ‘부모’의 역할을 맡았지만, 이후에는 기성세대의 전형을 유지하면서도 의외성으로 웃음을 주는 캐릭터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조석이 자신의 집을 배경으로 삼을 때면 그의 아버지가 거의 언제나 보이는 어떤 행동이 있다. 바로 ‘종이신문’을 보는 것이다. 조석의 아버지는 “종이신문을 읽는 사람”으로 자주 그려진다. 신문을 보는 데서 서사를 이끌어 나가는 데 필요한 각종 정보를 얻고, 어느 감정을 표현하고, 반드시 어떤 의도가 없더라도 그것을 일상화한 인물이다.

아버지 이외에 종이신문을 읽는 캐릭터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나의 유년시절에 그러했듯 <마음의 소리>에서도 신문은 아버지의 전유물이다. 특히 가장의 권위를 상징하기에 가장 간편한 장치이기도 하다. 813화 ‘가장의 권위’에서는 신문을 보는 아버지가 두 차례에 걸쳐 등장한다. 아버지는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고민하고 집안 곳곳에 자신의 말이 울려퍼질 수 있도록 스피커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그가 아들에게 내리는 ‘명령’은 “신문, 신문을 다오”라는 것이다. 가정의 일에 무심한 듯 신문을 보는 아버지의 모습은 여러 화에서 자주 등장한다. 640화 ‘집 떠나와’에서는 군대에 가는 아들에게 보이는 무관심이 신문을 보고 있는 한 컷으로 압축된다. 조석은 “내게 무슨 일이 있는지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였어”라고 부연해 두었다. 그렇게 가장의 권위와 불통을 내어 보이는 매개체로 신문이 선택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가장의 권위를 허물어뜨리는 데도 종이신문이 활용된다. 예컨대 364화 ‘인정해줘’에서는 가족이 모여서 “저게 새로 나온 아이팥이야, 부럽다, 나도 갖고 싶다” 하고 말하는 동안 아버지는 관심 없다는 듯 묵묵히 신문을 본다. 그러한 원초적 욕구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듯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하지만 곧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아버지는 “아이팥”이라고 말한다. 당황해서 “아… 안… 여보세요…”라고 하지만 가족은 이미 그를 바라보며 “부러우셨군” 하는 마음의 소리를 보낸다.

이젠 한 끼 식사의 받침으로 쓰이는 신문

조석은 신문 너머의 ‘시야’에 대해서도 그려낸다. 펼쳐진 신문은 외부와 내부의 시야를 모두 차단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폭력적이다. 그러나 신문을 보는 데 집중하더라도 다음 면을 읽기 위해 접고 넘겨야 하는 때가 있다. 그러면 잠시 동안 제한적으로나마 불통의 시간에 균열이 생기고, 그 바깥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615화 ‘우리집에 누가 산다’에서 조석은 아버지가 신문을 보는 동안 몰래 자신의 물건을 가져가려고 한다. 신문이 접히는 순간 위기를 맞이하지만, 제한된 시선을 이용해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속이는 데 성공한다. 드러나는 자신의 신체를 주변의 사물로 위장한 것이다.

조석이 그려내고 있듯 종이신문은 그대로 80세대의 아버지를 상징한다. 신문은 그 시대의 아버지들이 확보하고자 했던 가장의 권위만큼이나 그들의 손아귀에서 언제나 활짝 펼쳐져 있었다. 신문에 새겨진 활자의 무게는 그 시대의 아버지들이 어깨에 짊어진 책임의 무게와도 같았다. 종이신문은 그만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종이신문의 구독자가 많이 줄었다. 나의 아버지도 더 이상 종이신문이나 주·월간지를 정기구독하지 않는다. 대신 핸드폰으로 뉴스를 확인하고, 가끔은 구립 도서관에 가서 제본된 종이신문을 보는 것이 고작이다.

얼마 전 <경향신문>은 창간 70주년을 맞아 종이신문 위에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올려놓은 1면 디자인을 선보였다. 고달픈 청년들을 상징한다는 설명이 덧붙었지만, 그것은 그대로 종이신문이 가진 시대적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활자에 라면국물이 튀고 김의 부스러기가 묻어도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다. 그저 간단한 한 끼 식사의 받침으로 쓰고는 둘둘 말아서 쓰레기통에 넣으면 그만이다. 주머니의 핸드폰을 꺼내면 방금 버린 활자는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자신의 의견을 댓글로 달아 소통할 수도 있다. 그런 시대가 되었다.

가로쓰기와 한글전용이라는 종이신문의 혁신은, 그리고 인터넷과 모바일 환경의 확산과 함께 찾아온 읽기 방식의 다변화는 가족 구성원 모두를 읽기의 주체로서 견인해냈다. ‘종이신문을 보는 아버지’의 모습은 이제 80세대의 추억 속에 존재한다. 나의 아이는 핸드폰의 화면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가장 익숙하다. 30년 뒤에 그가 “나의 아버지는 그 고물 핸드폰을 날마다 들여다보았다”라고 회고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음의 소리>를 보며 나는 자연스럽게 나의 아버지를 추억한다. 그리고 내 아들이 추억할 나의 모습을 미리 추억해 본다.

<김민섭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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