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 자이 자이 자이>-모든 것이 난센스로 보이게 만드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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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말이 좋은 말인지 농담인지 진심인지 위선인지 좀처럼 구분이 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지옥의 참모습이다. ‘꿈도 희망도 없는 사회’란 누가 “사람의 길”을 걷고 있는지 구분할 수 없는 사회다.

꿈도 희망도 없는 사회의 지옥도를 마주했다. <자이 자이 자이 자이(Zai Zai Zai Zai) - 팝카로의 로드무비>(팝카로 지음, 이나무 옮김, 이숲, 2016. 이하 <자이>)라는 프랑스 만화에서다. 프랑스에서는 권위 있는 상을 수상했고 호평이 이어진 작품인데, 한국에선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왜 그런지도 파악해 볼 겸 여러 번 읽었더니 한국 사회 때문이라는 가설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상천외하고 씁쓸한 유머로 ‘꿈도 희망도 없는 사회의 지옥도’를 그려낸 작품이 흥미롭기에는 한국 사회가 이미 너무 ‘헬조선’이지 않은가. 요컨대 프랑스에서는 그 사회의 이면을 발견하게 하는 풍자로 이 작품이 받아들여졌다면, 한국에서는 그저 한국 사회의 전면과 다르지 않은 흔하디흔한 이야기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니 볼 마음도, 보고 느끼는 것도 없었을지 모르겠다. 어디까지나 가설이지만. 그래도 <자이>가 담고 있는 지옥도의 섬뜩함을 나만 곱씹자니 아쉽다. 무엇보다 생각할 거리들이 쏠쏠해서 우리를 비춰볼 거울로 손색이 없다. 어처구니없는 거울이라 더더욱.

파브리스라는 이름의 한 남자가 동네 마트에서 계산을 하려다 이렇게 말한다. “아, 바지를 갈아입으면서 회원카드를 챙기지 못했네요.” 이것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다. 당황한 파브리스에게 마트 매니저가 다가와 회원카드 대신 신분증을 요구한다. (아니 왜?) 신분증도 다른 바지에 있다고 하니 매니저는 어딘가로 따라오라고 한다. (대체 왜?) 파브리스는 당황해서 “나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회원카드 집에 있어요.” 말하다 도망치고 만다. (응?) 경비가 나서고 경찰도 출동한다. (헐….) 뉴스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경찰은 도주범을 찾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내무장관도 시민을 불안에 떨게 하는 이 문제를 신속히 해결하겠다고 천명했습니다.” (아아아….) 바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해 얘기하면서 사형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

프랑스 작가 팝카로의 만화 <자이 자이 자이 자이>의 한 장면 / 이숲

프랑스 작가 팝카로의 만화 <자이 자이 자이 자이>의 한 장면 / 이숲

기상천외하고 씁쓸한 유머와 풍자
초반부를 읽으면서는 위 괄호 속처럼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읽다 보니 어느 순간 적응이 되어 먼 거리에서 바라보게 되어버렸다. 그 후로는 ‘대체 여긴 어떤 사회인 거야?’라는 질문을 던지며 읽었다. <자이>에는 파브리스의 도피 행각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와 이 사건에 반응하는 각계각층 사람들의 반응을 담은 이야기가 함께 담겨 있는데, 그 모두가 하나같이 난센스다. 그 사회의 면면은 이를테면 이렇다.

TV 대담 프로그램에서 사회자와 평론가들이 파브리스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평론가 1: “저는 제 엄지와 검지를 맞붙여 제 주장에 무게를 싣겠습니다.” 평론가 2: “저는 더 강력하게 무게를 싣기 위해 양손의 손가락을 모두 맞붙이겠습니다.” 사회자: “주제에 집중합시다. 예를 들어 약간 비대칭적으로 턱을 괴고 있는 내 왼손에 관해 얘기해보도록 하죠.” 원래 주제는 파브리스 사건이었는데 말이다. 또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유머 만화가인 파브리스에 대해 논하다가 그 배후를 지목한다. “이런 유머 만화가들한테 금전적인 지원을 해주는 조직은 아무래도 출판사라고 봐야겠죠?” 다음은 학교다. 저 유명한 ‘톨레랑스’를 가르치는 수업에서 교사의 질문에 학생이 답한다. “톨레랑스는 우리와 생김새도 다르고 생각도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인정해주는 겁니다!” 틀리지 않은 답 같은데 이후 문답의 맥락을 보면 뭔가 이상하다. 도망 중인 범인은 1) “우리처럼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므로, 2) 차별하면 안 된다는 맥락이다. 2)보다 1)이 더 중요한 거다. 그 후는 더 압권이다. “네,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예요”라고 말한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한 학생이 손을 들자 이렇게 말한다. “말렉, 글쎄 넌 안 된다니까!” “아랍인 주제에!” 달리 말하면 아랍인 말렉은 ‘우리 같은’ 사람이므로 차별하면 안 되는 ‘톨레랑스’의 범주에 들어 있지 않으며, 그러니 차별해도 된다는 거다.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차별인지도 모르는 채로 차별을 할 수 있는 엄청난 논리다.

이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지만, 한국의 상황을 보면 이 난센스를 너무 잘 이해할 수 있어서 서글프다. 주제를 내팽개치고 논의할 가치가 없는 것에 대해 딴소리만 해대는 언론은 전혀 낯설지 않다. 최근 돌아가신 고 백남기 농민을 두고 이상한 데서만 떠들썩한 것은 그 선명한 예다. ‘따님의 발리 휴가’가 문제라는 보도가 특종이랍시고 전파와 지면을 탄 것은 저 손가락 이야기보다 당혹스럽다. 경찰의 폭력이라는 진짜 문제가 그만한 가치가 없는 걸까. 배후를 지목하는 행태도 마찬가지다. ‘시위꾼’이라거나 ‘종북’이라거나 하는 말도 안 되는 낙인을 통해 저항하는 자에게 모종의 배후나 ‘외부세력’이 있는 것처럼 만들었던 역사는 너무 오래되었고 늘 반복되었다. 이번에도 ‘시위꾼’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톨레랑스’의 난센스는 ‘발리 휴가’ 비판 보도의 난센스와도 닿아 있다. 저 이상한 ‘톨레랑스’ 속 ‘다른’과 ‘같은’의 논리처럼, 그 보도와 보도에 휘둘리는 한국 사회에는 ‘불쌍한 사람’과 ‘보통 사람’의 이항 논리가 있다. 그 마음의 소리는 이렇다. ‘유가족은 불쌍한 사람의 처지에 있어야 하는데, 휴가를 가는 걸 보니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이다. 욕하면 안 되는 불쌍한 사람이 아닌 거잖아!’

그런데 <자이>가 보여준 지옥도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말했듯 <자이>의 사회는 저같은 난센스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사회다. 그 자연스러움에 젖어 읽다 보니 내게도 그저 또 하나의 난센스로 보이던 한 장면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렇게만 읽었는데 세 번째쯤 읽으니 헷갈리기 시작했다. 작품 속 ‘선입견 없는 가수들’이 부른 “톨레랑스, 그건 너, 그건 나”라는 노래 가사다. “너희도 우리와 같아, 이것이 단 하나 우리의 원칙. 일본 만화가든 루마니아 걸인이든, 인종도 피부색도 상관없어. (중략) 만화가가 정상적인 직업이 아니라고 해서 누구에게든 만화가를 해칠 권리가 있는 건 아냐. 아르메니아 거지처럼 만화가도 똑같은 인간이라네. (중략) 언젠가는 너도 만화가가 될 수 있어.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 운명이라네.” 이건 앞선 학교 선생의 ‘톨레랑스’ 이야기와 분명 다르다. 톨레랑스의 범주를 ‘다른’의 범주에서 출발해 말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의 허구성을 지적하기 위해 가져온 정체성의 예들은 난센스처럼 보이지만, 메시지만큼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작품 속 사회가 죄다 난센스이다 보니 너무 헷갈린다. 어떤 말이 좋은 말인지 농담인지 진심인지 위선인지 좀처럼 구분이 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지옥의 참모습이다. ‘꿈도 희망도 없는 사회’란 누가 ‘사람의 길’을 걷고 있는지 구분할 수 없는 사회다.

단식까지도 ‘위선’으로 만드는 퍼포먼스
최근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의 비공개 단식은 우리 사회가 그런 사회로 진입해버릴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진정성의 퍼포먼스였다. 오직 한 사람의 관객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충성의 증명이었을 그 퍼포먼스는, 하지만 보도를 통해 가시화되면서 의도가 있든 없든 다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알 가치가 없는 일로 떠들썩해서 알 가치가 있는 일을 가리는 것은 이미 논했다. 하지만 더 무서운 면이 있다. 부당한 일을 당한 자가 목숨을 거는 행위인 단식이라는 인간의 저항 형식을, 그는 단 7일 만에 ‘주장에 힘을 싣기 위한 손가락 붙이기’처럼 보이도록 만든 것이다.

모든 것이 난센스로 보이게 만드는 것, 이것이 난센스가 만드는 최후의 지옥도다. ‘발리 휴가’를 그린 어느 끔찍한 만화까지 보고 나니, 어쩌면 그 지옥은 지금 여기 이미 와 있는 것만 같다. “톨레랑스, 그건 너, 그건 나”에 대한 <자이> 속 한 인물의 반응 같은 만화였다. “얼치기 개념 가수들…. 만화가는 한 명도 살지 않는 초호화 고급주택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살면서 저런 노래나 만들어 부르긴 너무 쉽지. 위선자들!”

난센스로 충만한 사회라는 지옥은 곧 올 것만 같다. 국가폭력 피해자의 유가족마저 ‘위선자’로 만드는 끔찍한 말과 그림, 스스로를 ‘위선자’로 전시하여 이전과 이후의 단식까지도 ‘위선’으로 만드는 퍼포먼스와 함께, 그것은 오고야 말 것이다. 우리가 “부디 ‘사람의 길’을 포기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유가족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난센스에 취해, 어떤 문제도 어떤 저항도 난센스 속에서 분간해 내지 못한다면 말이다.

<조익상 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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