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뒤흔든 20가지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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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시대를 뒤흔든 20가지 협상

협상의 전략
김연철 지음·휴머니스트·3만2000원

아버지는 늘 전쟁을 걱정하셨다. 식민지에 태어나 세계대전과 내전, 분단과 독재를 겪으며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당신으로선 당연한 우려였지만 내 눈엔 기우로 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한반도가 동북아의 최전선으로 떠오른 이즈음, 당신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비로소 알 것 같다. 당신이 곁에 있었다면 불안의 근거를 서로 물으며 근심을 덜었으련만…. 늘 그렇듯 시간은 너무 빠르고 나의 배움은 너무 더딘데, 다행히 막막한 마음에 의지가 되는 책을 만났다. 남북문제 전문가 김연철의 신간 <협상의 전략>이다. 여느 때라면 760여 쪽의 방대한 분량이 부담스러웠겠지만 그의 전작 <냉전의 추억>을 아주 재미있게 읽은 터라 오히려 반갑다.

‘세계를 바꾼 협상의 힘’이란 부제를 단 책에는 지난 세기를 뒤흔든 20가지 협상의 역사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중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와 한국전쟁 휴전협상 같은 유명한 사건도 있고, 유럽연합의 출발점이 된 유럽석탄철강공동체나 라틴아메리카 비핵지대조약처럼 역사적 의미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례도 있으며, 예멘, 미얀마, 수단, 키프로스 등 낯선 지역의 생소한 역사도 담겨 있다. 덕분에 책을 읽다보면 실제 사례를 통해 협상의 기술을 배우는 즐거움에 더해 세계 외교의 숨은 역사를 새로 알게 되는 가외의 소득까지 얻을 수 있다. 다만 세상엔 공짜가 없으니, 그 과정에는 괴로움이 따른다. 우리 자신의 무능과 그로 인한 처참한 결과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전쟁 같은 협상’이라 칭한 휴전협상은 그 중 하나로, 무려 2년 넘게 이어지며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협상 중에도 전투를 계속한다는 유엔군의 원칙 탓이었다. 전쟁 당사자인 한국은 협상테이블에 앉지도 못했고, 이승만 정부는 휴전 자체를 반대하며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인정하는 걸 치욕으로 여겼다. 만약 그때 38도선을 인정했다면 개성은 한국 땅이 되었을 것이며 소모적인 고지전으로 희생을 키우지도 않았을 터. 그러나 협상을 무시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도 이승만은 협상을 패배로 여기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그것은 고스란히 두 번째 실패, 한일협정의 굴욕으로 이어졌다. 그는 미국의 압력에 마지못해 나선 한일회담에서 일본어는커녕 한국어도 못하는 주미대사를 대표로 내세웠고, 맥아더가 선처해 줄 거라며 협상 준비도 하지 않았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10여년 뒤 박정희 정부가 명분도 실리도 챙기지 못한 푼돈을 받고도 “청구권 문제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선언한 데 비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으니, 준비도 철학도 비전도 없이 이루어진 이 협상들은 아직껏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

물론 협상은 성과 없이 끝나거나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300년에 걸친 중·소 국경협상이나 레이캬비크 미·소 정상회담이 보여주듯, 때론 협상 자체가 힘이 되며 실패가 미래의 성공을 낳는다. 비록 협상의 실패자가 된다 해도 핵무기 철폐를 꿈꾼 고르바초프 서기장이나 흑백갈등의 종식에 앞장선 데 클레르크 남아공 대통령처럼 공존과 화해를 이루는 데 기여했다면 그것은 “위대한 실패”이며 인류의 성공이다. 그래서 이 책은 실패를 두려워 않는 위대한 지도자들의 역할을 강조한다. 임박한 파국을 평화의 계기로 바꾼 것은 바로 그들, 결정적 순간에 협상을 택한 그들의 용기였기에.

<김이경 소설가/독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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