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파편들>
도널드 P. 그레그 지음·차미례 옮김
창비·2만5000원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종전선언을 놓고 입씨름이 계속되고 있다. 역사적 평양 방문 직후 뉴욕에 간 문재인 대통령은 평화를 위한 종전선언을 역설했다. 그러나 한국의 오른쪽 언론들이 단골로 찾는 미국의 ‘전문가’들은 한·미동맹 약화가 우려된다며 어깃장을 놓고 있다. 반면 미국의 석학 노엄 촘스키와 시민단체들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먼저 북한에 손을 내밀어 신뢰를 쌓을 것을 촉구한다. 재미있는 대목은 이들이 북·미관계 개선을 다룰 특별대표로 도널드 그레그를 지목한 것이다.
도널드 그레그가 누구인가? 1980년대 말 부르던 대학가의 집회나 술자리 선전선동에 등장하던 ‘핵무기 타고 한반도 달리던’ 그 주한 미국대사다. 반미의 아이콘이던 그레그가 이제는 ‘친북’의 딱지까지 붙여지고 있으니 역사와 인간의 양면성을 실감하게 된다. 1927년 생인 그는 한반도 비핵화의 첫 단추가 꿰어지던 1991년에 주한 미국 대사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미 중앙정보국(CIA) 직원으로도 남북한에 깊숙이 개입했다. 몇 년 전 펴낸 회고록 <역사의 파편들>은 남북한 최고권력자와 역사적 사건들에 관찰자로 혹은 행위자로 참여했던 비화와 증언으로 가득하다.
사실 그레그 대사는 한국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실현시킨 산파역이다. 1973년 8월에 일어난 김대중 납치사건 때 CIA 한국 지국장으로 활약을 펼쳐 (김대중 전 대통령을) 기사회생시켰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미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뤄진 일이지만, 우리 민주주의의 결절점을 만드는 데 공헌을 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정보업무에 종사한 주한 미국대사들과 한국 민주주의는 함수관계를 맺고 있다. 그레그처럼 CIA 출신인 제임스 릴리는 1987년 6월항쟁에, 해군 정보장교를 지낸 마크 리퍼트는 2016년 촛불집회 당시 서울에서 무슨 활동을 했을까. 이들이 인문학을 전공한 점도 공통적이다. 철학을 전공한 그레그나 문학을 전공한 릴리 등을 보자면 역시 겉모습보다 그 뒤에 숨은 실체를, 타고난 본성보다는 형성된 역사를 파악하라는 인문학적 훈련이 정보원의 사고방식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본적으로 그레그는 CIA 국장을 지낸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심복이었다. 나아가 미국의 국익을 냉전의 최일선인 한반도에서 지켜낸 ‘십자군’이었다. 본인에게는 애국적 활동이지만 한국의 독자로서 혈압이 올라가는 경험을 꽤 하게 된다. 독재정권의 뜨르르한 핵심 인사도 푸념 한 번에 날리거나 한국 장관에게 전화 한 통으로 미국 회사의 이권을 관철시키는 대목은 ‘웃프고’ 씁쓸하다.
그럼에도 그레그는 대사 시절 광주의 재야 인사들과 시도한 대화의 교훈으로 냉전전사에서 평화사절로 변신할 수 있었다고 추억한다. 인간적 존중을 우선적으로 지켜나가면 똑같이 존중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남한에서의 체험이 그를 북·미 화해의 선봉장으로 만들었다는 회고에서 역사는 참으로 절묘하게 작용한다고 재삼 느끼게 된다.
<정승민 독서팟캐스트 일당백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