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박경리(1926~2008)

나는 거의 여행을 하지 않았다
피치 못할 일로 외출해야 할 때도
그 전날부터 어수선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나다니기를 싫어한 나를
구멍지기라 하며 어머니는 꾸중했다
[…]

그러나 나도 남 못지않은 나그네였다
내 방식대로 진종일 대부분의 시간
혼자서 여행을 했다
꿈속에서도 여행을 했고
서산 바라보면서 여행을 했고
나무의 가지치기를 하면서도
서억서억 톱이 움직이며
나무의 살갗이 찢기는 것을,
그럴 때도 여행을 했고
밭을 맬 때도
설거지를 할 때도 여행을 했다

[…]

마음의 여행이든 현실적인 여행이든
사라졌다간 되돌아오기도 하는
기억의 눈보라
안개이며 구름이며 몽환이긴 매일반
다만 내 글 모두가
정처 없던 그 여행기 여행의 기록일 것이다

더위를 피해 어디론가 훌쩍 가면 좋겠지만, 이런저런 사연으로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대하소설 <토지>를 쓴 박경리 선생도 그랬던 모양이다. 그는 ‘여행’이라는 시에서 ‘나는 거의 여행을 하지 않았다’면서 일상생활에서 ‘보다 은밀하고 내면으로 내면으로’의 여행을 떠났다고 했다. 그 ‘마음의 여행’으로 주옥 같은 작품을 무수히 낳았다. 혹시 올여름 여행을 떠나지 못했다면 일상으로 ‘정처 없이’ 떠나보면 어떨까.

<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시로 여는 한 주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