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볼>-결국 맞잡을 것은 우리의 ‘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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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부우와 같은 거대한 악은 언제나 존재하고, 그때 우리에게는 더욱 큰 형태의 연대가 필요하다. 전선이 아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연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요즘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움직임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기존 ‘운동권’의 개입을 원치 않음을 명확히 하는 이들이 늘었다. 어느 여성단체는 갈등 끝에 아예 따로 집회를 열었고, 모 대학의 학생들은 소속 대학교의 학생들만으로 투쟁을 전개해 나가기를 원했다. 어째서 연대하려는 이들을 배제하느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지만, 그것은 온전한 주체가 되기 위한 당사자의 욕망일 것이다. 동시에 기존의 방법론을 따르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정해진 구호와 투쟁가를 부르는 대신, 자신들에게 가장 익숙한 문법으로 싸워나간다. 예컨대, 민중가요 대신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른다든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손을 내밀었던 이들은 졸지에 ‘외부세력’으로 규정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연대하는 것의 어려움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드래곤볼>은 따로 부연이 필요 없을 만큼 유명한 만화다. 그런데 단행본으로 42권에 이르는 이 작품의 긴 서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연대’다. 섬세하게 살펴보면, 연대의 세계관은 대단히 치밀하게 곳곳에 구현되어 있다. 특히 손오공의 승리는 언제나 연대의 승리였다.

손오공은 베지터와의 싸움을 앞두고 계왕신을 찾아가 몇 가지 비장의 무기를 배운다. ‘계왕권’과 ‘원기옥’이 대표적이다. 어느 단계를 넘어서고부터 계왕권은 더 이상 쓰지 않게 되었지만 원기옥은 작품의 후반부까지 꾸준히 등장한다. 마인부우와의 싸움, 그 대미를 장식하는 것 역시 원기옥이다. 손오공은 처음 원기옥을 사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지여, 바다여!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아. 내게 아주 조금씩만 힘을 나눠다오.” 그렇게 지구의 풀과 나무, 그리고 주변의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로부터 조금씩 에너지를 나눠 받는다. 거대한 악에 대항할 때마다 손오공의 전투력은 대개 조금씩 부족했고, 그에 따라 외부의 에너지를 빌려야 했다. 그것은 곧 ‘연대의 힘’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드래곤볼>의 손오공이 '원기옥'을 사용하는 장면. / 서울문화사

<드래곤볼>의 손오공이 '원기옥'을 사용하는 장면. / 서울문화사

손 내밀었다가 졸지에 ‘외부세력’ 규정
원기옥을 모으는 주체는 연대의 구심점일 수밖에 없다. 그에 따라 손오공은 전지구적 연대를 이끄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원기옥을 사용할 때, 손오공은 그 에너지를 동료인 크리링에게 전해 준다. 자신이 심한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리링은 베지터에게 원기옥을 명중시키지 못한다. 연대의 힘을 이끄는 이가 역량이 부족하다면 이러한 일이 벌어진다. 무엇보다도 “뭐해 이 멍청아! 그걸 빨리 쏴야지!”라고 하는 주변의 개입에 휘둘려 “제기랄”이라는 말과 함께 던져버렸다. 어떤 거대한 ‘힘’이 어렵게 조직되었다고 해도, 이처럼 그 구심점이 흔들리면 와해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빗나간 원기옥은 같은 편인 손오반을 향해 날아간다. 그런데 여기에서 손오공은 “악의 기가 없는 자라면 되받아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한다.

그런데 <드래곤볼>의 작가는 원기옥이라는 연대의 힘을 선한 사람만이 이용할 수 있음을 명확히 해두었다. 이것은 작품을 포위하고 있는 하나의 세계관이다. 연대의 힘을 잘못 사용했을 때 벌어지는 혼란, 실패했을 때 따르는 고통, 혹은 악한 목적을 가진 이에게 이용되었을 때의 절망, 이런 것을 우리는 아픈 현대사를 통해 목도해 왔다. 언젠가 거리에 모였던 수많은 사람들은 누군가의 잘못된 결정에 따라 뿔뿔이 흩어졌고, 어렵게 결집된 거대한 에너지도 거짓말처럼 소멸해버렸다.

그런가 하면 <드래곤볼>에서 전투력을 높이는 주된 방법은 물론 끝없는 수련이지만, 단기간에 전투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하는 어떤 행위가 있다. 그런데 그것은 그 주체가 선역과 악역 중 어느 편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우선 셀과 마인부우 등 대표적인 악역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흡수’다. 인간을 닥치는 대로 흡수해 자신의 전투력을 증폭시킨다. 마인부우는 도시 전체의 사람들을 초콜릿으로 만들어 먹어 치우고, 자신의 신체 일부를 떨어뜨려 두었다가 피콜로, 손오반 등 전투력이 높은 선역을 흡수하는 식으로 전투력을 계속해서 높여 간다. 선역들이 그에 대항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뽑아든 카드는 ‘퓨전’이다. 두 사람이 함께 일정한 동작을 하며 손가락을 맞대는 순간 둘은 30분 동안 한 몸이 되고 전투력이 대폭 상승한다. 나중에는 귀걸이를 다는 간편한 방식으로 바뀌는데, 이것으로 손오공과 베지터는 마인부우에게 맞선다. 흡수가 피주체에게 어떠한 동의를 구하지 않는 일방적인 폭력이라면, 퓨전은 두 주체가 서로 합의하고 손을 잡는 연대행위라고 할 수 있다. 작품에서는 퓨전의 시너지 효과가 훨씬 큰 것으로 묘사된다. 소수의 연대가 폭력적인 방식으로 덩치를 키운 다수에게 승리하는 것이다.

마인부우와의 마지막 싸움을 앞두고 손오공과 베지터는 귀걸이를 파괴시킨다. 그리고 각자의 힘만으로 싸우겠다고 말한다. 무모한 선택에 패색이 짙어지는 순간, 작가는 다시 한 번 ‘원기옥’이라는 카드를 꺼낸다. 퓨전이 선택받은 소수의 연대라면, 원기옥은 평범한 다수의 연대다. 그런데 여기에서 작가는 연대의 어려움을 극명하게 드러내며 효과적인 연대의 방식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손오공과 그의 친구들이 모은 에너지는 마인부우를 쓰러트리기에 부족했다. 그래서 손오공은 모든 지구인들에게 협력해 줄 것을 부탁하지만, 소수만이 그에 동참한다. 손오공이라는 개인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악마의 함정이라며 오히려 악담을 퍼붓기도 한다. 지구와 우주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느냐는 절박함을 전달하지만 “부탁하는 태도가 건방져”, “저런 건 무시해 버리자”라는 반응이 돌아올 뿐이다.

지구 곳곳의 생명체가 '원기옥'을 통해 에너지를 전하며 연대하는 장면. / 서울문화사

지구 곳곳의 생명체가 '원기옥'을 통해 에너지를 전하며 연대하는 장면. / 서울문화사

하나둘 모인 촛불, 대항 가능한 전선으로
가까운 이들을 설득하고 협력을 요청하는 일은 쉽다. 하지만 어느 범위를 넘어선 연대는 단순히 절박함을 전달하는 것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지구와 우주를 위한 일이라고 해도 이처럼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마인부우를 해치울 만큼의 에너지가 모였지만 체력이 떨어진 손오공은 그 원기옥을 감당하지 못한다. 작가는 이를 통해 다시 한 번 연대의 힘을 사용하는 주체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내보인다. 언제든 결집된 힘을 폭발시킬 준비 역시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드래곤볼을 통해 체력을 회복시키고서야 손오공은 마인부우에게 원기옥을 명중시킬 수 있었다.

연대의 세계관으로 다시 읽는 <드래곤볼>은 새롭게 다가온다. 손오공은 혼자서 지구를 지킨 일이 별로 없다. 언제나 천진반과 야무치, 차오즈 같은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친구들’의 힘을 빌렸고, 지구의 모든 생명체에게 힘을 나누어 주기를 부탁했다. 그렇게 저마다의 작은 에너지가, 그러한 촛불이 하나둘 모여 대항 가능한 전선이 형성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작은 연대만으로도 승리할 수 있다. 잘못된 사업을 철회하게 만들 수 있고, 누군가의 사과를 이끌어내는 일도 가능하다. 때로는 그것이 더욱 효과적인 방식이 되기도 한다. 손오공과 그 친구들의 에너지만으로도 가끔은 지구를 지켜낼 수 있다. 그러나 마인부우와 같은 거대한 악은 언제나 존재하고, 그때 우리에게는 더욱 큰 형태의 연대가 필요하다. 전선이 아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연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현실의 우리에게는 드래곤볼이 없기에, 결국 맞잡을 것은 우리의 손뿐이다.

<김민섭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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