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가라사대>-진부한 클리셰를 넘어서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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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클리셰를 파괴하기 위해 이 만화를 기획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다. 이 만화는 익숙한 구도와 장면을 불러 들여 독자로 하여금 뻔한 전개를 기대하게 한 다음, 그 예측을 화끈하게 뒤엎는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있다. 다분히 악의적인 이 말이 현재까지 유통되는 데에 있어 가장 큰 공헌을 한 건 드라마를 위시한 대중문화일 것이다. 많은 드라마에서 주요한 갈등구조는 언제나 여자 주인공과 악역을 맡은 서브 여자 주연 사이에 있었다. 소문난 악녀를 배출한 <아내의 유혹>, <왔다 장보리>를 떠올려보라. 이 드라마들은 두 여자의 갈등구도가 없었다면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했을까 싶을 정도로 스토리라인의 상당 부분을 서브 여자 주인공의 순전한 악의에 기대고 있다. 이러한 그녀들의 악의는 언제나 유사한 패턴으로 반복 재현되어 그 자체가 하나의 클리셰로서 굳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최근 다음에서 연재 중인 웹툰 <소년 가라사대>는 이러한 클리셰를 처참히 박살낸다. 처음부터 클리셰를 파괴하기 위해 이 만화를 기획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다. 이 만화는 익숙한 구도와 장면을 불러들여 독자로 하여금 뻔한 전개를 기대하게 한 다음, 그 예측을 화끈하게 뒤엎는다.

민홍 작가의 만화 <소년 가라사대>의 한 장면. / 다음웹툰

민홍 작가의 만화 <소년 가라사대>의 한 장면. / 다음웹툰

서브 여주인공의 악의에 기대는 패턴
10대 고등학생의 연애를 다루는 이 만화에는 착하고 귀여운 여자 주인공 ‘장태복’, 화려한 미녀인 서브 여자 주인공 ‘비비안나’, 그리고 키 크고 싸움도 잘하는 데다 잘생긴 남자 주인공 ‘강가라’가 등장한다. 태복은 비비안나의 미모에 기가 눌려 스스로 초라해지는 자신을 느끼고, 비비안나는 가라와 태복의 사이를 갈라 놓으려 한다.

얼핏 보면 너무나 진부한 구도지만 스토리의 전개 양상은 완전히 다르다. 일단 여자 주인공인 태복이 비비안나에게 쉽게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비비안나가 둘의 관계를 악화시키기 위해 악의적으로 흘리는 말에 대해 처음에는 태복도 흔들리지만, 스스로의 고민과 사유 끝에 마음의 중심추를 잡고 “이제 가라와 내 관계에 대해서는 내가 생각할게”라고 선언한다. 곧게 이야기하는 태복의 눈엔 한치의 흔들림이 없다. 태복은 비비안나에게 자신을 비교하면서 부정적인 감정에 침잠되기보다 가라와의 관계에 솔직해지고 자신의 감정에 직접 귀 기울이기로 결정한다.

비비안나 또한 그저 ‘나쁜 년’인 건 아니다. 태복과 가라의 관계가 진전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비비안나는 태복 앞에서 가라를 단 둘이 이야기하자며 옥상으로 불러낸다. 순순히 따라가는 가라와 불안해 하는 태복 사이에 웃음 짓는 비비안나의 표정은 진부함 그 자체였지만, 그 이후에 비비안나는 가라와 정말 대화만 했고, 대화 끝에선 ‘죽빵’ 한대를 날리며 자신의 마음을 정리해 버린다.

비비안나 역시 악녀였던 게 아니라, 가라에게 거절당했던 마음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질투와 상처가 남아 있던 십대 여학생일 뿐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여자 주인공은 서브 여자 주인공의 개입을 거절하는 단호한 캐릭터로, 악녀로 나타났던 서브 여자 주인공은 나름의 정당성과 성장을 보여주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재탄생한다.

<소년 가라사대>는 스테레오타입에 내재되어 있는 진부함과 부당함을 탈피하며 독자적인 감정선을 구축한다. 이들의 연애는 지극히 판타지에 가까운 희생과 연민, 질투와 분노가 아니라 일상적인 두근거림과 번뇌, 사춘기 특유의 혼란에 가깝다. 이 만화는 클리셰에 얽매여 근거 없는 의심이나 소모적인 적대에 컷을 낭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가라와 태복, 비비안나가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깊게 성찰하고 대상을 이해하며 스스로 성장하는 모습을 밀도 있게 그려내는 데에 집중한다.

[만화로 본 세상]<소년 가라사대>-진부한 클리셰를 넘어서야 하는 이유

성주군민과 ‘사드 배치’를 보는 시각
스테레오타입의 캐릭터는 인간이 삶을 통해 체득해 온 수많은 특징과 개별성을 삭제하고 가지치기하여 도달하는 영역이다. 좋게 말해 스테레오타입이지 사실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만들어진 허상의 인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의도적으로 인간을 오독하면서 이야기는 손쉽게 예측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삶의 영역에 진실되게 다가설 수는 없다.

이야기에서도 그럴진대 현실에서 과연 스테레오타입의 인간이 존재할까. 아님을 알면서도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스스로 상상한 스테레오타입으로 오독하곤 한다. 고백하자면 내가 그랬다. 반전 컷이 나오기 직전까지 태복과 비비안나의 구도를 상투적인 드라마 프레임 안에서 읽고 있었던 것처럼, 최근 사드 배치 문제와 관련된 성주군민들 역시 그렇게 이해하려 하고 있었다. 여당 텃밭, 회관에 걸려 있던 박근혜 대통령의 사진. 단지 몇 가지 단서만으로 그들을 쉽게 추측했다. 성주군민들이 ‘사드 배치 반대’를 외칠 때, 나는 그들의 목소리 속에서 삶이 걸린 절박함을 의도적으로 삭제했는지도 몰랐다. 그저 내가 이해하고 싶은 프레임대로만 그들을 끼워 맞추고 있었다. 편견이고, 선입관이었다.

지금 언론은 ‘외부세력’이라는 가당치 않은 클리셰를 도입해가면서 성주군민을 고립시키려 한다. 사드 배치와는 전혀 상관도 없이, 전라도 말투를 썼니 안 썼니 하는 괴이한 문제를 그들에게 들이대며 그들의 ‘순수성’마저 증명하라고 한다. 그런 데다가 일각에서는 이들이 지난 대선 때 몇 번을 찍었느니, 지지도가 어쨌느니 하는 문제를 들춘다. 성주군민들이야말로 사드로 인한 최대 피해자인데도 불구하고, 모든 포커싱은 청와대도, 국무총리도, 외교부도, 국방부도 아닌 성주군민에게만 집중되어 있다.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직접 입증해야 하는 데다가 ‘순전한’ 피해자가 되기 위해 자격 요건까지 일일이 취득해야 하는 상황이다.

지금 성주군민들의 구호는 ‘한반도 내 사드 배치 반대’다.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안전을 위협당할 위기에 놓인 그들에게 ‘다른 곳’이란 없다. 그리고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우리들에게도 ‘응당한 곳’ 따윈 없어야 한다. 편견은 인간과 삶, 주체성과 연대에 대해서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무엇을 위해, 그리고 무엇에 대해 싸우는가. 스스로 너무나 멀리 돌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점검해야 할 때다.

<조경숙 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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