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도시 그곳의 고통을 노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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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글래스, 스티브 라이히, 존 애덤스 같은 미국의 현대 음악가들 작품을 들을 때마다 느꼈던 어떤 불편함? 미묘한 아쉬움? 그런 것을 이번에 <아름다움의 구원>을 읽으며 떠올렸다.

서푼어치 허명에 들뜨지 않고, 가급적 숨어 지내며, 읽고 싶은 책 듣고 싶은 음악에 사무쳐 사는 것을 언제나 바라건만, 바로 그 이유, 즉 읽거나 들은 것에 대하여 글을 쓰다 보니, 이따금 미디어에 몇 마디 하는 일도 있다. 녹음되어 들리는 제 목소리나 녹화되어 몇 발자국 앞에서 보이는 제 모습은 낯설다. 탁한 공기에 뒤섞여 들리듯 어색하고 큼직한 텔레비전 화면에 클로즈업된 얼굴이 서투른 자가 빚은 플라스틱 조형물 같다.

더 난감한 것은 내가 일부러 강조하며 말한 부분 대신 제작자들이 다른 관점에서 내 말의 다른 부분을 선택하였을 때다. 내 말이 그 이전과 이후에 이어지는 다른 화면들과 겹쳐지면서 다소 맥락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벌써 20년 전쯤, 1996년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를 했는데, 이 충격의 발표와 관련하여 어느 텔레비전 연예 프로그램과 인터뷰를 했다. 나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남긴 획기적인 음악적 공헌에 대하여 말하였으나, 당시 제작진은 그 말을 하기 전에 내가 서두로 꺼낸 말, 즉 “많은 팬들을 몰고 다니며…”와 같은 말을 편집하여 공연 장면과 붙였는데, 내 말은 그저 ‘소녀 팬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은 아이돌 스타의 갑작스런 은퇴’ 정도의 훈수가 되고 말았다.

설치 미술과 제프 쿤스의 ‘풍선 개’

설치 미술과 제프 쿤스의 ‘풍선 개’

며칠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KBS의 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한병철의 신간 <아름다움의 구원>을 다뤘는데, 그 책에 대하여 나도 두어 시간에 걸쳐 사전 인터뷰를 했다. 제작진으로서는 방송 프로그램의 전반적인 맥락 속에서 내 말의 특정 부분을 선택해야 하는 수고를 겪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악마의 편집’은 아니었다. 가수 김창완, 모델 이현이, 만화가 이종범, 아나운서 박은영 등의 독특하고도 깊이 있는 의견이 두루 섞여서 흘러가는 프로그램이었므로, 내가 유별나게 강조한 부분이 선택되지 않았다고 해서 크게 섭섭할 일은 아니었다. 다만,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하였는데 화면으로는 선택되지 않아 아쉬웠다.

한병철의 신간 <아름다움의 구원>을 읽고
<피로사회>로 유명한 한병철의 신간 <아름다움의 구원>은 ‘매끄러움’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현대의 예술과 생활 전반을 통찰한다. 설치미술가 제프 쿤스의 ‘풍선 개’, LG의 첨단 핸드폰, 여성들이 주로 하는 브라질리언 왁싱 등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물성, 즉 ‘매끄러움’은 신자유주의에 예술이, 미가, 삶이 예속화되는 현상이라고 한병철은 말한다. 직접 그의 문장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제프 쿤스의 ‘풍선 개’ 같은) 매끄러운 조형물들 앞에 서면 그것을 만지고 싶다는 ‘촉각 강박’이 생겨나고, 심지어 그것을 핥고 싶은 욕망까지 일어난다. 그의 예술에는 거리를 두게 하는 부정성이 빠져 있다. 오로지 매끄러움의 긍정성만이 촉각 강제를 불러일으킨다. 이 긍정성은 관찰자를 거리 없애기로, 터치로 이끈다. 그러나 미적 판단은 관조적인 거리를 필요로 한다. 매끄러움의 예술은 이 거리를 없앤다.”(12쪽)

한병철은 제프 쿤스 같은 예술가의 상업화된 조형적 도발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일상을 관류하는 디지털 라이프 스타일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관찰을 보여준다. ‘셀카’에 대한 그의 언급을 들어보자.

“내면의 공허를 덮기 위해 셀카의 주체는 자신을 생산하려고 헛되이 애쓴다. 셀카는 공허한 형태의 자아다. 셀카는 공허를 재생산한다. 나르시시즘적인 자기애나 허영심이 아니라 내면의 공허가 셀카 중독을 낳는다. 여기에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안정된 나르시시즘적 자아가 없다. 오히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부정적 나르시시즘이다.”(26쪽)

현대음악가 필립 글래스 영상음악 ‘코야니스콰시’의 한 장면.(외쪽) 한병철의 신간<아름다움의 구원>표지.(오른쪽)

현대음악가 필립 글래스 영상음악 ‘코야니스콰시’의 한 장면.(외쪽) 한병철의 신간<아름다움의 구원>표지.(오른쪽)

<피로사회>가 그랬듯이 한병철의 이러한 수사는 복잡한 현상의 본질을 꿰뚫는 힘이 있다.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실타래를 단번에 해체시켜 사태의 전말을 확증하는 힘이 있다. 유럽의 근현대 미학이론에 사전 지식이 어느 정도 있는 교양 독자들을 매료시키는 메시지로서의 힘이 있다. 그런데, 어떤 단언들은 그야말로 ‘매끄럽게’ 변해가는 유럽의 어느 도시는 모르겠으되 우리의 도시 생활처럼 불안과 불만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교차하는 파편화된 곳에서 적용 가능한지 의문이다.

‘셀카’에 대한 한병철의 진단은 셀카에 집중하는 사람들을 조금은 멀리서 ‘관찰’한 듯한 인상을 준다. 틀림없이 셀카는 ‘공허한 형태의 자아’이다. SNS에서 ‘좋아요’를 누르는 것으로 대표되는 ‘디지털’도 한병철의 말처럼 “전적으로 매끄럽다. 그것에는 어떤 균열도 있어서는 안 된다. 부정성 없는 만족, 다시 말해 내 마음에 든다라는 것이 디지털 미의 징표다. 디지털 미는 어떠한 낯섦도, 어떠한 비동일성도 허용”하지 않는다. 현상적으로 충분히 그러하며 디지털 세계에 작동하는 회로와 접근의 마인드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일까. 셀카를 찍는 사람들의 애틋한 자기 연출, 그렇게 연출한 세계를 두 번 세 번 다시 보며 리터치를 하고 공유를 하는 사람들의 지극히 애처로운 자기 연민에 대해서도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는 곳곳에서 강제로 호명당한다. 사회나 국가는 물론이고 심지어 친구나 가족도 때로는 고립된 자아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 갑의 갑작스런 호명에 따라 약속된 행동양식으로 즉각적인 반응을 해야만 하는 을이 스스로를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는 가장 쉽고도 일상적이며 적극적인 행동이 ‘셀카’이며 ‘좋아요’다. 그것이 표면적으로는 매끄러운 행위지만, 그 행위를 둘러싸고 있는 공포스런 세계의 위협적인 호명을 생각하면, ‘셀카’와 ‘좋아요’로 하루를 버티는 사람들의 내면세계는 충분히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셀카’와 ‘좋아요’로 하루를 버티는 사람들
시인 함민복이 오랜만에 방송에 나온 적 있는데, 진행자가 “책은 읽지 않고 스마트폰만 보는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하고 묻자, 큰일입니다, 책을 읽어야 하는데 디지털 기기에만 빠져서 참 큰일입니다, 하는 식의 예측 가능한, 따라서 지루하고 게으른 답변 대신 “그 안에 뭔가 절실한 것이 있겠지요. 참으로 절실한 것이 있어서 그렇게 보고 있지 않을까요?”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나는 한병철의 <아름다움의 구원>을 균형있게 읽으려면 시인 함민복의 이러한 날카로운 직관을 동시에 생각하며 읽어야 한다고 촬영 때 말하였으나 방송에는 나오지 않았다.

필립 글래스, 스티브 라이히, 존 애덤스 같은 음악가들 작품을 들을 때마다 느꼈던 어떤 불편함? 미묘한 아쉬움? 그런 것을 이번에 <아름다움의 구원>을 읽으며 떠올렸다. 이 미니멀리즘 음악가들도 이제는 여든이 다 되어 가는 원로이고, 현대 도시의 강력한 물질성의 위기를 다룬 하이너 괴벨스 같은 충격의 작곡가들도 노장 대열에 끼는 형편이니, 이들이 한 세대 전에 했던 음악을 테러와 죽음이 만연한 21세기의 도시에 적용하기는 어렵다. ‘현대 도시 문명의 위기와 인간의 불안’을 다룬 이들은 일종의 ‘68세대 음악가’로서 자신들의 신성한 의무를 다 마쳤다고 할 것이다.

물론 스티브 라이히는 ‘9·11’ 직후를 다뤘고, 일흔이 넘은 필립 글래스도 ‘오큐파이’ 집회 때 직접 뉴욕의 거리에 나와 항의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것은 그것대로 존중할 만한 작업이요 위엄 있는 행동이었지만 오늘의 죽음, 특히 우리가 겪는 이 도시의 고통, 우리가 겪는 이 도시의 극심한 불안과는 아무래도 조금 동떨어져 있다. 마치 한병철의 <아름다움의 구원>이 베를린이나 뮌헨에는 어울릴지 몰라도, 겉보기에는 매끄럽게 느껴지지만 실은 죽음의 도시 서울에서 악착같이 살아가는 울퉁불퉁한 일상에는 적용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과문한 탓에 그들 이후의 각혈하는 음악, 검게 그을린 선율, 피로 물든 작업을 아직은 찾아 듣지 못하여 일단 이렇게 쓴다. 더 찾아서, 더 들어봐야겠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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