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화의 드레스덴을 지킨 쉬츠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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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전쟁이 시작하는 시기에 드레스덴 궁정음악과 교회음악을 맡았던 쉬츠는, 한 번 들으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거룩하면서도 간절한 기도의 음악을 작곡하여 전쟁의 참화로 무덤이 되어버린 도시들을 위로했다.

고개를 돌리자, 바로크 시대였다.

2006년의 기억이다. 독일 월드컵에 출전한 한국 대표팀의 경기장은 프랑크푸르트. 그러나 숙소가 부족하여 내가 묵을 곳은 자동차로 1시간 남짓 떨어진 드레스덴이었다. 깊은 밤에 드레스덴에 도착하였으므로 그 도시는 흡사 구동독 시절의 획일적인 시설물들을 보여주었는데, 다음날 조금은 한가로운 시간이라서 도시를 둘러보는 동안 2만5000개의 마이센 자기 타일로 된 길이 102m, 높이 8m의 장대한 ‘군주들의 행렬’ 타일 벽화를 지나는 순간, 갑자기 드레스덴은 300여년 전의 바로크 시대로 회귀해 버렸다.

사방에서 들려올 듯한 바로크 협주곡
절대왕정 시기, 바로크식 도시 설계의 상징으로 꼽히는 츠빙거 궁전을 중심으로 해 마치 바로크 시대를 풍미했던 변주곡 양식처럼 거의 모든 건물들이 정교한 규칙 속에 배열돼 있되 각각은 저마다의 기능에 맞게 독자적인 양식으로 변주되어 펼쳐져 있었다. 궁전을 중심으로 하여 행정, 종교, 집회 등의 다양한 기능을 가진 건축물들이 압도적인 크기로 배치돼 있되 각각은 정교한 기하학적 구성으로 정련되고, 또한 세부의 극한적 디테일 묘사가 치밀하여 그야말로 발이라도 한 번 크게 구르면 드레스덴 구도심지가 화려하면서도 정교하고, 복잡하면서도 강렬한, 끝없이 변주되며 궁극의 조화를 찾아나가는 바로크 협주곡을 사방에서 들려줄 것만 같았다.

800년 역사의 드레스덴 성십자가교회 합창단

800년 역사의 드레스덴 성십자가교회 합창단

그럼에도 나는 조금은 고개를 숙인 채 성십자가 교회로 갔다. 오랫동안 들어오던 드레스덴 성십자가 교회 합창단의 앨범들이 그쪽으로 방향을 지시했다. 이 교회 합창단의 역사는 무려 800년이 넘는다. 1300년쯤 라틴어와 음악을 가르치는 기숙학교가 교회 안에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9살부터 19살까지의 소년들이 주축이고, 소년합창단 출신으로 전문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된 성인들이 포함되어 있다. 페터 슈라이어, 테오 아담, 올라프 베어 같은 성악가들이 이 합창단 출신이다. 이 합창단은 세계 곳곳으로 순회공연을 갖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하는 일은 교회의 미사에 전례음악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전문 순회공연단이 아니라 교회 미사를 담당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하인리히 쉬츠!

서양음악의 북극성인 바흐도 작센 공국의 수도인 드레스덴에 흔적을 남겼지만, 그의 복무 도시는 라이프치히였고 그곳에서 27년을 보냈기 때문에 아무래도 이 왕정 도시와는 거리가 멀다. 대신, 드레스덴에는 하인리히 쉬츠가 있다. 아니, 드레스덴 하면 쉬츠다. 그는 드레스덴의 성십자가 교회 소년 합창단 출신으로,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8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초기 바로크 왕정 시대의 고결한 산물인 성십자가 교회를 지상 위에 축성된 신성한 장소로, 다시 말하여, 너무도 고결하여 듣는 순간 눈물이 흐르고 지독히도 슬퍼서 듣는 순간 참회를 하게 되는 음악을 남겼다.

1585년 튀링겐에서 태어난 쉬츠는 1599년부터 카셀의 궁정교회에서 본격적인 음악 수련을 받았고, 17세기 초에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가서 전문 음악가로서 익혀야 할 당대의 주류 음악, 즉 베네치아악파의 모든 것을 익혔다. 1617년 이후 드레스덴의 궁정악단 지휘자가 되었으며, 1627년에 잠시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으나 전쟁의 여파로 곳곳을 전전하다가 1645년에 드레스덴으로 돌아와 궁정악단과 교회 전례음악을 재건하는 데 힘썼다.

자, 이렇게만 쓰면 너무 밋밋하고 굳이 동유럽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고풍스런 도시 드레스덴에 가서 우울하게 성십자가 교회를 순례할 이유가 달리 없다. 쉬츠의 생애와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본격적으로 드레스덴의 궁정음악과 교회음악을 책임지게 될 시점에 전쟁이 터졌다는 것이다. 그것도 30년전쟁 말이다. 유럽 열강이 사실상 최초의 세계대전이라고 할 만큼 맞붙은 이 전쟁의 무대는 바로 독일 전역이었고, 그가 활동했던 드레스덴 역시 전쟁의 참화로 도시 전체가 파괴 직전까지 가는 비극을 겪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마무리된 이 전쟁은 로마가톨릭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견제와 균형으로 유지해 온 이른바 중세 1000여년의 권력구조가 붕괴되는 전쟁이었으며, 프랑스·네덜란드·영국 등의 서유럽 절대주의 군주들이 ‘주권, 영토, 국민’이라는 근대국가 체제를 출발시킨 전쟁이었으며, 기존의 가톨릭에 더하여 루터파와 칼뱅파 같은 개혁 종교들이 유럽 전역에서 동등한 지위를 확보하는 전쟁이었는데, 무엇보다 드레스덴 같은 도시가 파괴되는 전쟁이기도 했다. 당시 어느 독일 시인은 ‘가도 가도 끝없는 무덤의 행렬’이라고 전쟁의 참화를 기록했다. 마그데부르크 같은 도시는 인구의 3분의 1가량이 전쟁폭력으로 학살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30년전쟁이 시작되는 시기에 드레스덴 궁정음악과 교회음악을 맡았고, 그 전쟁의 절정기에 여러 도시를 전전하기도 했던 쉬츠는 한 번 들으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거룩하면서도 간절한 기도의 음악을 작곡하여 전쟁의 참화로 무덤이 되어버린 도시들을 위로했다. 그 비극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비통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쓰다듬었다. 드레스덴의 성십자가 교회가 쉬츠의 지극한 위로와 애틋한 참회의 기도가 울려퍼진 공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곳으로 갔던 것이다.

경기도 동탄 신도시 아파트에 세워진 ‘육탄 10용사’ 조형물.

경기도 동탄 신도시 아파트에 세워진 ‘육탄 10용사’ 조형물.

물론, 물리적 차원에서 내가 그 교회에 갔을 때는 미사가 진행되는 시간이 아니었고 관광객들이 꽤 있었기 때문에 경건하여 차마 숨을 쉬기도 어려운 쉬츠의 오라토리오 <십자가 위의 일곱 말씀>이나 태어나서 아무런 죄도 지은 게 없을 소년들이 애통하게 부르는 <장송음악>을 듣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2차 대전 때 연합국의 폭격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되고, 분단으로 인하여 구동독의 고립되고 폐쇄된 도시가 된 드레스덴을 음악으로 지켜낸 성십자가 교회의 지휘자 루돌프 마우에스베르거의 명반들을 수도 없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 교회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쉬츠의 음악들은 계속 환청처럼 내 몸을 감싸주었다.

내가 겪은 전쟁도 아니고, 무려 300여년 전의 저 17세기의 30년전쟁이었건만, ‘가도 가도 끝없는 무덤의 행렬’ 시기에 작곡된 쉬츠의 음악은 지옥 같은 전쟁과 죽음을 수도 없이 치른 검은 도시 드레스덴의 21세기를 위로하고 있었다.

추모의 음악 하나 없는 한국의 6월
뭐지, 하면서 나는 급히 차를 세웠다. 얼마 전의 일이다. 학교에서 고속도로를 타기 위하여 동탄 신도시의 주변 도로를 달리다가 순간적으로 눈에 띈 조형물 때문이었다. 차를 안전하게 세운 후, 고층 아파트 사이에 조성된 공원으로 가보았다. 6·25전쟁 때의 ‘육탄 10용사’, 그들을 추모하는 조형물이었다. 본격적인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38선 전역에서 남북 간의 국지적인 군사적 충돌이 있었는데, 개성 송악산 고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남북 간의 충돌 때 거의 맨몸으로 북한군의 토치카(고지전의 주요 거점)를 공격하고 산화한 군인들이 ‘육탄 10용사’다. 그 중 세 명이 경기도 화성 출신이기 때문에 동탄 신도시에 ‘육탄 10용사 기념공원’이 조성된 것이다.

나는 이들을 진심으로 추모하고, 더불어 6·25 한국전쟁의 참화를 기억하며, 따라서 두 번 다시는 이런 끔찍한 전쟁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생각하기를, 이 끔찍한 전쟁을 추모하는 방식, 기억하는 형식, 재현하는 방식이 여전히 ‘전쟁의 양식’이라는 점을 비통하게 생각한다. 이 지면의 성격과 연관하여 말하건대, 6·25 한국전쟁의 참화와 비극을 제대로 기억하고 추모하는 음악이란 거의 없다.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국가주의적이며 호전적이다. 전쟁의 비극을 호전적으로 재현하는 일도 숱하다. ‘전통적인’인 6·25 체험 주먹밥 먹기 행사는 물론이고, 올해는 서초구청과 국군 화생방 방호사령부가 지역 내 유치원과 초등학생 어린이 200여명을 대상으로 ‘총기류 체험행사’까지 가졌다. 관련 행사 사진을 보면, 꼬마아이들이 집총자세를 하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총을 쏴보는 시늉을 하고 있다.

아, 도대체 전쟁의 참화는 무엇이고 그 비극은 무엇이란 말인가. 쉬츠의 거룩한 위로는 고사하고, 전쟁을 호전적이고 호승적인, 여전히 박살내는 비극의 재현이 거의 유일한 이 분단된 나라의 전쟁 기억이란 참으로 비통하다. 추모의 음악 하나 제대로 없이 해마다 6월이면 호전적인 음악만 울려퍼지는 비극의 나라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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