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하는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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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의 그리움(Fernweh)! 모르는 얼굴과 마음과 언어 사이에서 혼자이고 싶은 마음! 텅 빈 위와 향수를 안고 돌로 포장된 음습한 길을 거닐고 싶은 욕망, 아무튼 낯익은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모르는 곳에 존재하고 싶은 욕구가 항상 나에게는 있다.” 전혜린의 수필 <먼 곳에서의 그리움>의 일부다. ‘여기보다 어딘가에’를 꿈꿨던 젊은이들이 밑줄 그었던 문장이다. 젊은 날의 넘치는 에너지는 ‘머묾’보다 ‘떠남’, ‘정주’보다는 ‘유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의 스무살 ‘태희’도 ‘여기보다 어딘가에’를 꿈꾼다. 그는 뱃사람이 되고 싶어 원양어선을 타러 갔다가 무시만 당하고 쫓겨난다. 보따리 하나 들고 떠도는 거지가 지나가다 그를 놀래켜도 무섭기보다 궁금함이 앞섰다.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떠도는 거지의 삶이 말이다. 결국 태희는 가족사진에서 자기 사진만 도려낸 뒤 뉴질랜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부실한 근로감독 속에서 불법파견업체의 횡포에 상처입는 근로자들이 늘고 있는 가운데 경기도 안산역 인근의 인력소 모습. / 이준헌 기자

부실한 근로감독 속에서 불법파견업체의 횡포에 상처입는 근로자들이 늘고 있는 가운데 경기도 안산역 인근의 인력소 모습. / 이준헌 기자

그러나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전혜린의 열망도, 태희의 선택도 낯설다. 취업난, 고용유연화, 불안정한 내일 앞에서 머무는 것도 떠나는 것도 전적으로 자본이 결정한다. <부유하는 노동자: 정왕1동 노동자들의 노동과 생활세계>(김철식·2016년)는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부유하는 반월·시화공단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곳의 파견노동자들은 오늘 당장 해고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단기간의 노동을 반복하며 공단을 유랑하고 있다. 이들은 돈을 빨리 벌어 이 지역을 벗어나고 싶어하면서 한편으로는 좀 더 나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아 지역에 정주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두 가지 열망은 좀처럼 실현되지 못한다. 떠날 곳도 머물 곳도 없는 오늘날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이다.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태희’의 친구 ‘지영’이 마주친 ‘떠도는 거지’는 공포 그 자체였다. 조손가정에서 가난하게 사는 그는 언젠가 자기도 거지처럼 될까봐, 저렇게 떠돌다가 어디서 어떻게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를까봐 두려웠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내일에 대한 공포에 질려 있는 수많은 ‘지영’들이 있다. 전통과 인습에 대항해(전혜린), 가족중심주의의 통속성에 질려(태희) 떠나는 건 청춘서사의 클리셰(cliche)이자 자연스러운 권리였다. 그러나 무능한 한국 사회는 이러한 클리셰마저 드물고 낯선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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