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세계>-선생님, 당신의 강의실은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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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생이라는 주체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규정해 왔다. 그런데 수많은 미지라는 개별주체로서 학생들을 섬세하게 바라보았는지, 아니면 하나의 집단으로 속 편히 대상화해 온 것인지, 자신이 없어졌다.

지난달에 ‘지방시의 강의실’이라는 주제로 대중강연을 했다. ‘지방시’는 작년에 쓴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책의 약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대학에서 강의하는 동안 강의실은 나에게 특별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그 의미와 가능성에 대해 나름의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젊은 전직 시간강사의 부족한 강연이었지만 그에 호응한 현직 시간강사들이 자리를 채워주었다. 그런데 강연보다도 그들의 경험과 철학을 듣고 싶어졌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빠르게 나의 말을 마치고, 그들에게 “당신들의 강의실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자유로운 발언의 기회가 주어지자 강사들은 곧 학생에서 자기 본연의 자세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독특한 강의 방식을 말하기도 했고, 수업을 제시간에 끝내는 것이 좋은지 어떤지 의견을 나누기도 했고, 강의평가 결과를 공유하며 웃음 짓기도 했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나를 포함해 대부분이 학생을 이해하는 ‘좋은 선생님’으로 자신을 규정해 나갔다. 그 강의실에 ‘나쁜 선생님’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묵묵히 지켜보던 누군가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앳된 얼굴이었다. 그는 자신을 모 여대에 다니는 2학년 학부생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는 모두에게 “<미지의 세계>라는 만화를 보신 일이 있나요?” 하고 물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미지의 세계>를 몰랐다.

대학에서는 읽어야 할 책을 언제나 권장하지만 정작 미지에게는 가장 나중 순위의 지출 대상일 뿐이다. ‘모임’ 역시 곧 ‘지출’이다. 언제나 핑계를 생각해 두어야 한다./유어마인드

대학에서는 읽어야 할 책을 언제나 권장하지만 정작 미지에게는 가장 나중 순위의 지출 대상일 뿐이다. ‘모임’ 역시 곧 ‘지출’이다. 언제나 핑계를 생각해 두어야 한다./유어마인드

조별 과제보다 커피값, 밥값, 술값 걱정
<미지의 세계>는 ‘미지’라는 대학생의 일상을 그린 연작 만화다. 주인공 미지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대학생이다. 전공 공부를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연애를 하고, 좋아하는 밴드의 공연을 보러 간다. 하지만 그 일상을 대하는 미지의 태도는 평범하지 않다. 특히 상상 속에서는 욕설도 거침없이 하며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욕망을 쉽게 분출해 낸다. 자신보다 발표를 잘한 학생을 ‘묻지마 폭행’의 희생양으로 만들고, 그의 가족을 강제수용소로 보내고, 가스실에서 죽게도 만든다. 그러한 감정의 진폭이 대개 여과 없이 그려진다. 미지는 그러한 모습을 스스로 혐오하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니 괜찮다고 합리화한다. 그러면서 누구나 숨기고 싶지만 자신의 세계에서 가능한 모든 것에 대해서도 적나라하게 내보인다. 예컨대 섹스, 성적취향, 가난, 담배, 음주와 같은 것들이 모두 주된 소재가 된다. 마치 가면을 벗은 모든 인간의 세계를 그리고 있는 듯하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정말이지 ‘그로테스크’하다.

학생이 손을 들었을 때 강사들은 ‘조별과제’에 대한 토론을 하던 참이었다. 조별과제 때문에 고통받는 학생들이 많은 것을 모두 이해하고 있으며, 그래서 어떤 특별한 방법을 도입했는가 하는 것이 주가 되었다. 어느 강사는 조장에게 조원평가의 권한을 준다고도 말했고, 기말시험에 조원의 이름을 모두 써내게 해 참여도를 평가한다고도 했다. 저마다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여러 방식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데 학생은 우리의 고민은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니에요, 하고 ‘자신의 세계’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대학의 강의실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미지들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이자혜 작가의 만화 <미지의 세계> 1권의 표지./유어마인드

이자혜 작가의 만화 <미지의 세계> 1권의 표지./유어마인드

그에 따르면 미지는 조별과제 점수를 잘 받고 싶은 욕망보다는 우선 조별과제 모임에 부담을 느끼는 존재다. 자신이 지출해야 할 커피값, 밥값, 술값과 같은 비용을 걱정하는 것이다. 대학생들의 모임은 대학의 강의실과 세미나실뿐만 아니라 카페나 패밀리레스토랑에서도 이루어진다. 조원들의 단합을 위해서 그것을 더욱 선호하는 일도 많다고 한다. 그러면 커피 한 잔에 더해 나누어 먹을 케이크나 아이스크림을 시켜야 하고, 자리를 옮겨 저녁식사라도 함께하게 되면 지출비용이 계속 불어난다. ‘미지들’에게 조별과제의 모임이 학교 바깥으로 이어지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강사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어느 수업의 커리큘럼이 누군가의 일상을 흔들어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미지는 술자리가 마음에 들면 자리에서 빠져나와 편의점에 달려가 급히 술을 마신다. 취하는 데도 돈이 필요한데, 그러면 싼값에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돌아가 일행과 어울린다. 어느 날은 막차가 끊겨 비명을 지른다. 야간의 택시비는 계획에 없던 지출이다. 결국 택시에 올라타 ‘조건만남’이라도 해야 할까, 하는 상상에 빠진다. 친구가 택시비에 보태라며 5만원을 주는 날도 있지만 미지는 그 돈을 받아들고는 24시간 카페에 들어가 밤을 새고 첫차를 탄다. 마음에 드는 교수님이 수업 중 추천해준 책이 있으면 도서관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언제나 자신보다 먼저 빌려가는 학생들이 있고 책읽기는 포기한다. 아르바이트를 해도 책을 사는 일은 가장 뒤로 밀리고 결국 사지 못한다.

“대학에서의 가난은 잘 드러나지 않아요”
강의실의 미지는 수강 철회를 해야 했던 아픈 기억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강의 첫 시간에 강사는 학기 중 모든 수강생이 함께 1박2일로 전주영화제에 참석해야 한다고 공지했는데, 그것은 커리큘럼에 없는 내용이었다. 어떤 학생들은 재미있겠다며 기뻐했지만 미지는 조용히 그 강의실에서 빠져나왔다. 1박2일의 경비를 지출해야 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부담이었다. 연극 과목을 강의한다는 어느 강사는 “저도 연극을 보고 오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커리큘럼에는 써놔요…” 하고 말했는데, 미지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는 알 수 없다. 미지의 이야기를 듣는 강사들의 표정은 점점 복잡해졌고 강의실의 공기는 무거워졌다. 그럴 리가 있느냐, 하는 표정을 짓는 이들이 많아지자 그는 “이것은 저와 제 주변의 이야기이기도 해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는데, 그것이 그 자리의 모두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대학에서의 가난은 잘 드러나지 않아요.”

나는 그간의 여러 글에서 강의실이라는 공간과 학생이라는 주체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규정해 왔다. 그런데 수많은 미지라는 개별주체로서 학생들을 섬세하게 바라보았는지, 아니면 하나의 집단으로 속 편히 대상화해 온 것인지, 자신이 없어졌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가난’으로 계급화될 수 있다고 생각해본 바가 없다. 그러한 감정이 나뿐 아니라 그 강연에 참석했던 여러 젊은 강사들의 표정에서도 그대로 읽혔다. 강의실에 더 이상 ‘좋은 선생님’은 없었다. 강연이 끝나고 나는 학생을 따로 찾아 감사를 전했다. 그런데 나 말고도 그런 강사들이 더 있었다. 안면이 있는 어느 선배 강사는 상기된 표정으로 “오늘 강의는 네가 아니라 저 학생에게 들었어”라고 말하고는 “그동안 강의실의 학생들을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아무것도 몰랐던 것 같아 부끄럽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타인을 규정하려는 버릇이 있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서는 물론이고 세대, 성별, 지역 등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모든 타인은 ‘미지의 존재’다. 자기 자신도 제대로 규정해 낼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그래서 누군가를 완벽히 이해했다고 믿는 일은 ‘폭력’이다. 타인의 처지에서 사유하고 공감하기보다는 온전히 상대방이 가져야 할 슬픔의 폭까지 정해두고 그것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강의실에서도, 그리고 2016년 5월의 강남역에서도, 우리는 모든 타인이 ‘미지’임을 전제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특히 남성들에게 <미지의 세계>를 권하고 싶다. 내가 그랬듯 누구도 쉽게 공감할 수 없을 것이지만, 그렇기에 이 작품은 의미가 있다.

<김민섭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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