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저우…호포천 물로 우려낸 ‘용정차’는 천하의 명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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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시지 않고 맹물을 마시는 것은 중국인에게 단순히 차와 맹물의 문제가 아니다. 차는 그들의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는 뿌리 깊은 문화이기 때문이다. 땔감·쌀·식용유·소금·간장·식초와 더불어서 ‘차’는 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다.

항저우 하면 서호를 떠올리게 되고, 서호 하면 용정차를 떠올리게 된다. 아름다운 서호와 향기로운 용정차는 환상의 콤비다. 항저우는 서호와 전당강(錢塘江, 첸탕장) 때문에 안개가 많이 낀다. 서호 인근에 분포된 차밭은 녹음과 운무가 가득하다. 게다가 차 재배에 적합한 온도와 강우량 덕분에 항저우는 용정차의 본향이 되었다. 사봉(獅峰), 용정(龍井), 오운산(五雲山), 매가오(梅家塢) 등 서호 인근에서 생산되는 용정차를 ‘서호용정차’라고 한다. 서호용정차는 용정차 중에서 품질이 가장 뛰어나며, 중국의 10대 명차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청나라 건륭제가 봉한 ‘18어차’
용정차는 녹차에 속한다. 따라서 찻잎을 따는 시기가 매우 중요하다. 명전차(明前茶)니 우전차(雨前茶)니 하는 용어는 찻잎을 따는 시기에 따라 용정차를 구분한 것이다. 청명 이전에 따서 만든 차를 ‘명전차’라 하고, 청명 이후 곡우 이전에 따서 만든 차를 ‘우전차’라고 한다. 더 이른 봄에 딴 명전차가 우전차보다 더 부드럽고 품질도 좋다. “청명 이전에 딴 차는 보배”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우전차의 품질도 괜찮은 편이다. 하지만 곡우 이후 입하 이전에 채취한 차는 품질이 많이 떨어진다. 지금이 한창 명전차와 우전차가 시장에 나올 시기다.

호포천의 유래를 표현한 석각

호포천의 유래를 표현한 석각

용정차가 명실상부한 명차의 반열에 오른 건 청나라 때다. 여기엔 건륭제(1711~1799)의 영향이 컸다. 건륭제는 단 하루도 차가 없으면 안 된다고 했을 정도로 차 애호가였는데, 그가 특별히 좋아한 차가 바로 용정차다. 건륭제는 강남을 여섯 번 순행했는데, 그 중 네 차례나 용정을 찾았다. 찻잎을 따는 장면을 구경하고, 용정차에 관한 시를 짓기도 했다. 사봉산(獅峰山) 아래 호공묘(胡公廟)에 있는 18그루의 차나무를 ‘18어차(御茶)’라고 하는데, 바로 건륭제가 어차로 봉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역대 황제 중에서 최장수한 이가 바로 건륭제다. 차를 유난히 좋아했던 게 그가 장수한 원인 중 하나라고 한다. 흥미롭게도 나이를 가리키는 단어 중에 ‘다수(茶壽)’라는 표현이 있다. 108세를 가리키는 말이다. ‘茶’ 자를 분해하여 더하면, ‘十(10)+十(10)+八十(80)+八(8)=108’ 복이 되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차가 건강에 좋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파자(破字)로 인해 생겨난 ‘다수’라는 표현이, 의미상으로도 차와 장수를 연결짓는 게 참으로 절묘하지 않은가.

차 맛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가 바로 ‘물’이다. 용정차와 더불어 ‘항저우 쌍절(雙絶)’로 칭송되는 게 바로 ‘호포천’이다. 색·향기·맛·형태가 모두 뛰어난 용정차를 호포천의 물로 우려낸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호포천의 물을 그릇에 가득 담고서 동전을 넣어보면 신기하게도 물이 밖으로 넘치지 않는다. 표면장력이 크기 때문이라고 한다. 호포천은 대자산(大慈山)의 정혜선사(定慧禪寺) 안에 있는 샘물이다. 호포천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정혜선사를 호포정혜사 혹은 호포사라고도 한다.

호포천은 ‘호포몽천’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는 재미난 전설이 담겨 있다. 당 원화(元和) 14년(819)에 성공(性空) 스님이 이곳에 와서 머물게 되었는데, 물을 구하기 어려워서 다른 곳으로 옮길 작정이었다. 그런데 꿈에서 신선이 나타나 말하길 “남악(南嶽)에 동자천(童子泉)이 있는데, 호랑이 두 마리를 보내 이곳으로 옮겨오게 할 것이다”라고 했다. 과연 다음날 호랑이 두 마리가 나타나 땅을 파더니 맑은 샘물이 솟아나는 게 아닌가! 이게 바로 호포천이라고 한다. 호포천을 지나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석각 부조가 있는데, 잠든 성공 스님과 호랑이 두 마리가 생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으로 머리를 괴고 옆으로 누운 스님은 왼손에 염주를 쥔 채 두 눈을 지긋이 감은 모습이다. 그 곁에는 호랑이 두 마리가 땅을 파고 있다. 석벽에 적힌 ‘몽호(夢虎)’라는 글자는 유명한 서예가 구팅룽(顧廷龍)이 쓴 것이다.

재미난 전설이 담겨 있는 ‘호포몽천’
현재 호포사는 공원으로 바뀐 상태다. 이곳은 제공(濟公, 1148~1209)과 홍일(弘一, 1880~1942), 두 고승과도 깊은 인연이 있다. 송나라 고승 제공이 입적한 곳, 남산율종(南山律宗)을 중흥시킨 홍일대사가 출가한 곳이 바로 호포사다. 이곳의 제조탑원(濟祖塔院)에는 제공의 평생 사적을 담은 부조들이 있는데, 하나같이 제공이 일으킨 기적에 관한 것들이다. 그 중 항저우 비래봉(飛來峰)과 관련된 전설을 소개하기로 한다. 어느 날 제공은 산봉우리가 날아온다는 것을 알고 마을 사람들에게 얼른 떠나라고 알려주지만 다들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러자 제공은 결혼식을 올리고 있던 신부를 업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황급히 그 뒤를 쫓았다. 얼마 뒤 쿵 소리가 나더니 산봉우리가 마을을 덮치는 게 아닌가! 제공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때 날아온 산봉우리가 바로 비래봉이라고 한다.

건륭제가 봉했다는 18그루의 ‘어차’

건륭제가 봉했다는 18그루의 ‘어차’

제공은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했다. 술과 고기를 즐겼고 차림새와 언행도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한편 그는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돕는 데 발 벗고 나섰으며 신통력도 뛰어났다. 훗날 사람들은 그런 제공을 활불(活佛)로 칭송했다. 제공과 그가 행한 기적 같은 일들이 백성들에게 널리 퍼졌으며, 그의 이야기는 책으로 엮이고 극으로도 공연되었다. 제공 전설은 2006년에 국가급 비(非)물질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중국의 중요한 문화자산이다.

호포사의 리수퉁(李叔同) 기념관과 홍일정사(弘一精舍), 홍일법사 사리탑은 모두 홍일대사와 관련이 있다. 리수퉁(홍일대사의 속명)은 일본에서 유학하고 중국으로 돌아와 미술과 음악을 가르쳤다. 서양 유화와 오선보를 중국에 소개한 이도 바로 리수퉁이다. 뛰어난 예술가이자 교육자였던 그가 돌연 불교에 귀의한 때는 1918년, 서른아홉이었다. 그 계기는 2년 전의 단식이다. 여기에는 친구 샤멘쭌의 영향이 컸다. 샤멘쭌은 일본 잡지에서 단식에 관한 글을 보게 되는데, 단식은 몸과 마음을 ‘갱신’하는 수양법이며 석가·예수 등 종교의 위인들은 모두 단식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리수퉁은 샤멘쭌의 소개로 이 글을 읽고 단식을 시도했다. 그가 단식했던 곳이 바로 호포사의 홍일정사다. 단식 이후에 그는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결국 출가까지 하게 된다. 계율을 실천하는 삶을 철저히 견지했던 홍일대사는 허운(虛雲)·태허(太虛)·인광(印光)과 더불어 중국 근대의 4대 고승으로 꼽힌다.

홍일대사의 삶이 어떠했는지 대변해주는 일화를 소개하기로 한다. 어느 날 친구 샤멘쭌이 그를 찾아왔을 때의 일이다. 마침 홍일대사는 식사 중이었다. 식탁에 놓인 건 밥과 짠지, 맹물 한 잔이 다였다. 그걸 본 샤멘쭌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짠지가 너무 짜지 않은가?”

“짠 것은 짠 것 나름의 맛이 있다네.”

“차를 마시지 않고 맹물을 마시면 너무 싱겁지 않은가?”

“싱거운 것은 싱거운 것 나름의 맛이 있다네.”

샤멘쭌은 훗날 <생활의 예술>에서 홍일법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홍일법사의 세계에서는 누더기, 찢어진 자리, 낡은 수건도 매양 좋다. 청채(靑菜), 무, 맹물도 매양 좋다. 짜도 괜찮고 싱거워도 괜찮으니, 매양 좋다. 자질구레한 일상의 삶에서 그 온전한 맛을 음미할 수 있고, 즐거운 마음으로 인생의 진면목을 관조할 수 있다. 이처럼 자유로운 마음은 마치 밝은 달과 같으니, 그 얼마나 신묘한 경지인가!”

중국다엽박물관의 육우 청동상.

중국다엽박물관의 육우 청동상.

차문화 발전사 전시한 ‘다엽박물관’
차를 마시지 않고 맹물을 마시는 것은 중국인에게 단순히 차와 맹물의 문제가 아니다. 차는 그들의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는 뿌리 깊은 문화이기 때문이다. 시미유염장초차(柴米油鹽醬醋茶), 중국에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필수품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다. 땔감·쌀·식용유·소금·간장·식초와 더불어서 ‘차’는 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다. 남송 오자목(吳自牧)의 <몽양록(夢梁錄)>에서 “집집마다 매일 없으면 안 되는 것이 땔감·쌀·식용유·소금·간장·식초·차”라고 했듯이, 중국 역사에서 차가 일반 백성에게도 보편화된 것은 송나라 때다. 이는 송나라의 경제적 번영 덕분이다. ‘차’는 인생의 여덟 가지 우아함 중 하나로도 꼽힌다. 인생의 여덟 가지 우아함이란, 거문고·바둑·서예·그림·시·술·꽃·차다. 한편으로는 쌀과 소금으로서의 차, 또 한편으로는 거문고와 시로서의 차, 중국인에게 차란 바로 이런 의미다. 정신적 차원에서 ‘차’의 의미를 음미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여, 중국 사학계의 거목 첸무(錢穆)의 글을 소개한다.

“자극을 추구하려면 반드시 먼저 자극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바쁨, 복잡함과 변동, 불안정과 흔들림, 고민과 초조, 바로 이런 마음 상태에 있어야 자극을 추구하게 된다. 자극은 단연코 생명의 바깥에서 오는 것이지, 생명이 아니다. 흔상(欣賞, 좋아하여 즐김)은 생명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명과 하나다. 먼 길을 가다가 우연히 잠시 멈추게 되었을 때,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바로 서둘러서 길을 재촉하는 것도 나름의 맛이 있다. 이 총망함 속에서 만약 차를 마신다면, 담담한 맛이 싫고 자극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며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차를 마시는 데는 나름의 정취가 있다. 편안하고 한가로운 가운데 평온한 마음으로, 혼자서 즐기거나 친구와 함께 감상한다. 고요히 생각에 잠기거나 흉금을 터놓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눈다. 시간에 구애받으면 안 되고, 다른 일에 얽매여 있어도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차는 그저 담담할 뿐 맛이 없으며, 마셔봐야 갈증을 해소할 뿐 흔상할 수는 없다. 요즘에는 중국인도 차를 마시는 것에서 자극을 찾으려 하는데, 그야말로 진정한 맛을 모르는 것이다.”(<흔상과 자극>)

앞서 홍일법사는 맹물을 마시면서도 바로 이러한 ‘차의 진정한 맛’을 음미할 수 있었으리라. 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곳 더 들러보자. 서호 가까이에 있는 ‘중국다엽(茶葉)박물관’이다. 1991년에 정식 개원한 중국다엽박물관은 차문화를 주제로 한 국가급 전문 박물관이다. 중국의 차문화 발전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대표적인 차들의 견본이 총망라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중국 역대의 각종 다기까지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 가면 차의 파종에서부터 수확과 가공, 보관과 음용에 이르기까지 차에 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국의 지역별 다양한 차문화를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박물관 뜰에 세워진 2.5m 높이의 청동상은 다성(茶聖)으로 칭송되는 당나라 육우(陸羽)다. 육우는 차의 바이블로 일컬어지는 <다경(茶經)>의 저자다. 그는 차 생산지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쌓은 지식과 차에 관한 역대 문헌을 바탕으로 <다경>을 저술했다. <다경>에서는 차가 신농씨(神農氏)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온갖 풀을 맛보느라 하루에 72가지의 독을 만났는데 차로 그 독기를 풀었다”(<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는 전설적인 인물이 바로 신농씨다. 물론 이 이야기는 전설이지만, 차의 최초 용도가 ‘약용’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차는 정말 몸과 마음의 ‘약’인가 보다. 그 약효가 잘 발휘되려면, 차의 진정한 맛을 허락할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리. 108세 ‘다수’도 어려운 일이지만 108가지 번뇌에서 자유로워지는 건 더 어려운 일 같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다른 일에 얽매여 있지도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럼에도 소원한다. 내면의 생명과 하나된 ‘온전한 즐김’을. 그런 의미에서 오늘만큼은 커피 대신 차 한 잔이 어떨까. 아니, 물인들 어떠리. 자유로움의 시간을 누릴 수 있다면야, 서호에서 용정차를 마시는 것이 부러우랴.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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