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저우…위대한 문호 소식, 백성을 위해 ‘소제’를 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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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저우에서의 유배 생활이 끝나고 5년이 지난 뒤 소식은 두 번째로 항저우에 부임했다. 성숙한 그로부터 나오는 글도 정치도 삶도 성숙 그 자체였다. “구제불능의 낙천가, 위대한 인도주의자, 백성의 친구, 위대한 문호”, 이게 바로 소식이다.

소제춘효(蘇堤春曉), 곡원풍하(曲院風荷), 평호추월(平湖秋月), 단교잔설(斷橋殘雪). 서호의 봄·여름·가을·겨울의 절경을 표현한 말이다. 같은 계절이라도 서호의 아침·낮·저녁 풍경이 다르다. 어디 그뿐인가, 맑은 날과 궂은 날의 풍경도 다르다. 그리고 그 다른 모습들이 제각기 아름답다. 북송의 대문호 소식(蘇軾, 1037~1101)은 이런 서호를 중국의 대표적인 미인 서시(西施)에 비유했다.

물빛 찰랑찰랑 반짝반짝 맑으니 좋고,
산색 희뿌여니 비 내려도 훌륭하구나.
서호를 서시에 빗댄다면,
옅은 화장 짙은 화장 모두 잘 어울리는구나.
- <맑은 뒤 비 내리는 서호에서 술 마시며(飮湖上初晴後雨)>

언제 찾아가더라도 아름다운 서호지만, 요즘처럼 푸른 수양버들과 붉은 복숭아꽃이 어우러진 봄날이면 더 좋을 것이다. 이런 봄날 서호십경의 ‘소제춘효’를 만끽할 수 있는 건 바로 소식 덕분이다.

서호의 소식 석상

서호의 소식 석상

두 차례 관직 지내며 백성의 삶 돌봐
소식은 항저우에서 두 차례 관직을 지냈다. 처음엔(1071~1074) 항저우 통판(通判)이었고, 두 번째(1089~1091)는 항저우 지주(知州)였다. 앞의 시는 그가 통판을 지냈을 때 쓴 시다. 15년 뒤 소식은 항저우 지주로 있으면서 서호에 제방을 쌓았다. 그 제방이 바로 소제(蘇堤)다. 호수를 준설할 때 나온 진흙으로 서호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제방을 만든 것이다. 2.8㎞에 달하는 제방의 축조는 그야말로 일석이조 그 이상의 효과를 거두었다. 저수량이 증가하고 호수의 자정능력이 향상되어 수질이 호전되었다. 덕분에 서호의 미관이 개선되었고, 가뭄과 홍수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고, 식수원과 관개용수로서 제 기능을 다할 수 있었고, 배의 운항이 원활해졌다. 또한 제방 덕분에 호수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도보 통행이 가능해졌다. 게다가 마름을 재배해서 올린 소득으로 서호를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

소제의 축조가 더욱 뜻 깊은 이유는 그 사업이 백성의 삶을 보듬으려는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소식이 부임하던 해에 항저우 일대는 자연재해로 흉작이 들었다. 그는 이듬해에 바로 조정으로부터 예산을 확보해 서호를 준설하고 제방을 쌓았다. 소제의 축조는 일종의 공공근로사업이었던 셈이다. 항저우 백성들은 이 일에 노동력을 제공한 덕분에 어려운 시기를 견뎌낼 수 있었다. 소제는 ‘소공제(蘇公堤)’의 약칭이다. 소공은 소식을 가리키는 것이니, 소공제는 소식의 제방이라는 의미다. 소식에 대한 백성들의 애정이 담긴 명칭이 바로 ‘소제’다.

항저우를 대표하는 음식인 ‘동파육(東坡肉)’ 역시 소식과 관계가 있다. 항저우 백성들이 소식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설날에 돼지고기를 바쳤는데, 소식이 그것을 요리해서 서호를 준설했던 이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돼지고기를 네모지게 썰어서 간장·설탕 등을 넣고 푹 졸인 요리가 바로 동파육이다. 소식보다 소동파라는 호칭이 우리에게 더 익숙한데, 동파육은 바로 소동파가 만든 돼지고기 요리를 의미한다. 이 역시 소식에 대한 백성들의 애정이 담긴 명칭이다. 항저우 동파육의 원형은 쉬저우(徐州) 회증육(回贈肉)이라고 한다. 일찍이 소식이 쉬저우 지주로 있었던 해(1077)의 일이다. 쉬저우 일대에 홍수가 나서 소식은 쉬저우 백성들과 함께 70여일 동안 홍수와 사투를 벌였다. 홍수가 물러간 뒤 백성들은 고난을 함께해준 소식에게 감사의 의미로 그가 좋아하는 돼지고기를 바쳤다. 소식은 그것을 요리해서 백성들에게 답례품으로 건넸다. ‘회증(回贈)’은 답례를 의미한다. 홍수와 싸우느라 애쓴 백성들의 노고에 감사할 줄 알았던 소식, 백성들은 그런 그가 선사한 돼지고기 요리를 ‘회증육’이라 명명했다.

소식이 돼지고기 요리를 한층 업그레이드한 건 황저우(黃州)로 유배되었된 시기(1080~1084)다. 그가 <저육송(猪肉頌)>에서 밝힌 돼지고기 요리법은 “솥을 깨끗이 씻은 뒤 물을 조금 붓고 장작을 피우되 불꽃이 일지 않게 하여 천천히 고기를 익히는 것”이다. 소식은 다음처럼 돼지고기를 예찬했다. “황저우의 질 좋은 돼지고기, 값이 진흙처럼 싸다네. 부귀한 이는 먹으려 하지 않고, 가난한 이는 요리할 줄 몰라. 아침에 일어나 두 그릇 해치우면, 내 배 부르니 그대는 상관하지 마시라.” 진흙처럼 싸니 실컷 먹을 수 있는 돼지고기를 맛나게 요리한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소식의 돼지고기 요리법은 성공적이었다.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그의 요리법은 점점 대중화되었다. 황저우 유배 시절에 소식은 황저우 동쪽 언덕의 땅을 개간해서 농사지으며 ‘동파거사(東坡居士)’를 자처했다. 소동파라는 호칭도, 동파육이라는 요리명도 바로 당시의 동파거사라는 호에서 유래한 것이다.

쉬저우는 동파육이 탄생한 곳, 황저우는 동파육이 업그레이드되어 완성된 곳, 항저우는 동파육이 본격적으로 이름을 떨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동파육이 업그레이드 된 황저우는 소식에게 생의 전환점이 된 곳이기도 하다. 세기의 천재였던 그는 스물둘에 2등으로 과거에 급제했다. 당시 문단의 영수이자 과거를 주관했던 구양수(歐陽修)가 가장 훌륭한 답안을 자신의 제자인 증공(曾鞏)이 쓴 것이라 생각하고 괜한 오해를 피하고자 일부러 2등으로 올렸는데, 그게 바로 소식의 답안이었던 것이다. 구양수는 소식이 천하에 독보적인 문장가가 될 것이라 예견했다.

서호의 사계를 표현한 세계문화유산 기념주화.

서호의 사계를 표현한 세계문화유산 기념주화.

홀로 명성이 너무 높아 죽음에 내몰려
소식의 삶과 문장이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 게 된 진정한 시발점은 황저우에서였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1079년에 발생한 ‘오대시안(烏臺詩案)’은 그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황저우로의 유배는 없었을 테고, 그랬다면 <적벽부(赤壁賦)>를 비롯한 천고의 걸작들도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대시안은 소식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이들이 소식의 문장을 멋대로 왜곡해 그를 무고한 사건이다. 신법당과 구법당의 정쟁에 소식이 애꿎이 당한 면도 다분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소식의 동생 소철(蘇轍)의 말처럼 “홀로 명성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소식을 시기 질투하는 이들은 그의 글을 꼬투리 잡았다. 그들은 소식이 조정을 풍자하고 황제에게 불충하니 죽을 죄를 지었다며 소식을 사지로 몰았다. 소식은 오대(烏臺), 즉 어사대 감옥에 갇힌 채 몇 달 동안 심문을 받았다. 당시 소식은 죽음을 예감하며 감옥에서 동생 소철에게 보내는 시(獄中寄子由)를 썼다. 이 절명시(絶命詩)에서 그는 자신이 죽으면 항저우 서호에 묻힐 것이라고 했다. 소식이 감옥에 갇힌 뒤 항저우 백성들은 그의 안녕을 빌며 몇 달 동안 불공을 올렸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소식이 얼마나 큰 위안을 받았겠는가. 그래서 항저우에 묻히길 바랐던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인 걸까. 항저우 백성들의 지극한 정성에 하늘이 감동했는지, 소식은 죽음을 면했다. 대신 황저우로 유배된다.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렸던 소식에게 유배 생활은 재생(再生)의 시간이었다. 열악하고 비참한 상황에서 그의 영혼은 영롱히 빛을 발했다. 황저우에서 그는 진짜 ‘성숙’한 존재가 되었다. 위추위(余秋雨)는 <황저우에서의 돌파(黃州突圍)>라는 글에서 소식의 성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성숙이란 밝지만 눈을 자극하지 않는 빛, 매끈매끈하면서도 귀에 질리지 않는 소리, 더 이상 다른 이의 눈치를 보지 않는 침착함, 주위를 향한 애걸을 멈춘 당당함, 법석거림을 거들떠보지 않는 미소, 극단적인 것을 씻어낸 담담함, 떠벌릴 필요 없는 견실함, 결코 가파르지 않은 고도(高度)다. 넘치는 호기가 발효를 거치고, 날카로운 산바람이 기세를 거두고, 세찬 시내가 호수를 이루니, 그 결과, 천고의 걸작을 이끌어낼 전주가 울려 퍼지고 신비스러운 하늘의 빛이 황저우에 닿으니, <적벽회고(赤壁懷古)>와 <적벽부>가 곧 탄생할 것이었다.”

황저우에서의 유배 생활이 끝나고 5년이 지난 뒤 소식은 두 번째로 항저우에 부임했다. 성숙한 그로부터 나오는 글도 정치도 삶도 성숙 그 자체였다. 소식의 평전을 쓴 린위탕(林語堂)의 평가처럼 “구제불능의 낙천가, 위대한 인도주의자, 백성의 친구, 위대한 문호”, 이게 바로 소식이다. 그가 항저우에서 두 차례 관직을 지내며 지낸 시간은 5년이다. 다음 시(送襄陽從事李友諒歸錢塘)에서 토로한 것처럼 소식은 항저우를 정말로 사랑했다.

항저우에서 지낸 시간이 5년,
나 스스로 항저우 사람이라 생각하네.
고향에도 돌아갈 집 없으니,
서호 근처에서 살고자 하네.

봄날의 소제

봄날의 소제

그런데 항저우에서의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원우(元祐) 6년(1091)에는 잉저우(穎州)로, 이듬해는 양저우(揚州)로, 그 이듬해는 딩저우(定州)로 잇달아 임지가 바뀌었다. 원우 8년에는 고(高)태후가 세상을 뜨면서 철종이 친정하게 되자 신법당이 다시 정권을 잡는다. 그 여파로 이듬해 소식은 광둥의 후이저우(惠州)로 폄적된다. 소식의 시련은 끝이 없는 듯, 3년 뒤(1097)에는 하이난(海南)의 단저우로 유배된다. 예순이 넘은 나이, 중국의 남쪽 끝 하이난, 끼니를 해결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궁핍함, 이 암담한 상황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식은 이곳에서도 성숙한 삶을 놓지 않았다. 끊임없이 글을 썼고, 학당을 열어 앎을 베풀었다. 하이난의 소수민족인 리족(黎族)과 더불어 지냈고 하층민과 스스럼없이 지냈다. 리쩌허우(李澤厚)의 말대로, “소식은 끊임없이 자아를 위로하며 어떠한 환경에도 적응하고 만족하는 ‘낙관’의 정서”(<미의 역정>)를 지닌 사람이었다. 철종이 죽은 뒤에야 유배에서 풀린 소식은 북쪽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창저우(常州)에서 세상을 떴다. 이때가 1101년, 그의 나이 예순다섯이었다.

성숙한 인격 지닌 ‘구제불능의 낙천가’
소식은 쓰촨 메이저우(眉州) 출신이다. 그런데 그는 스스로를 항저우 사람이라 생각한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은 본래 단저우 사람이라고도 했다. 또한 영남(嶺南, 광둥) 사람으로 사는 것도 좋겠다고 했다. 어딜 가든 그곳을 자신의 고향처럼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니 소식이 가는 곳마다 그곳 백성들이 그를 좋아했던 건 당연한 일이다. 저주스러워할 만한 운명을 충만한 일상으로 이겨낸 소식, ‘구제불능의 낙천가’는 이렇게 고난 속에서 탄생하고 성숙했다.

서호는 이 ‘구제불능의 낙천가’의 자취가 짙게 밴 곳이다. 항저우뿐만 아니라 잉저우·후이저우에도 서호가 있다. 소식은 평생 제방을 세 차례 쌓았는데, 바로 항저우·잉저우·후이저우의 서호를 준설하면서 쌓은 것이다. 모두 ‘소제’라는 이름을 지닌 세 곳의 제방은 치적 쌓기용 전시성 행정과는 결이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 수혜자는 오롯이 백성이었다.

항저우 서호의 소제가 시작되는 부분에는 소식의 석상이 있다. 머리를 들고 하늘 저 멀리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모습이다. 그러고 보니 소식의 자(字)가 ‘자첨(子瞻)’이다. 멀리 내다본다는 의미다. 소식의 지독한 낙관주의적 기질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게 아니다. 그것은 피나는 노력을 통해 후천적으로 획득한 능력이다. 그 노력은 다름 아닌 멀리 내다보는 훈련이었고, 그 내다봄의 경계는 우주적 차원의 것이었다. “변한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천지도 일순간을 유지하지 못하지만, 변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만물과 더불어 나 역시 다함이 없으니 부러울 게 무엇이랴!”(<적벽부>) 좋은 봄날이다. 천천히 소제를 거닐고 싶다.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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