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정상인(紅頂商人), 상인으로서 고관에 봉해진 호설암을 가리키는 말이다. 홍정은 청나라 고관이 쓰던 모자다. 호설암은 공신에게만 주어지는 황색 마고자인 황마궤까지 걸치며 최고의 부와 명예를 누렸다.
1861년, 항저우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이수성(李秀成)이 이끄는 태평천국군이 항저우를 공격한 것이다. 장시(江西)에서 증국번(曾國藩)에게 패한 뒤 저장(浙江)으로 후퇴한 태평천국군은 저장 일대를 순식간에 휩쓸었다. 태평천국군에 포위된 항저우는 철저히 고립되었다. 성 안의 양식은 바닥이 났다. 풀뿌리와 나무껍질은 물론 먹을 수 있는 건 죄다 동이 났다. 아사자가 십만을 넘었고 길에는 시신이 널렸다. 심지어 자식을 바꿔서 먹는 참상까지 벌어졌다. 인간세상의 천당이라던 항저우가 불과 몇 달 사이에 지옥이 된 것이다. 결국 저장순무 왕유령(王有齡)은 성문을 열고 백성들을 성밖으로 나가게 했다. 이해 12월 29일, 항저우는 함락되었고, 왕유령은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항저우가 함락되자 청 조정의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증국번의 추천을 받은 좌종당(左宗棠)이 저장순무에 임명된다. 좌종당은 태평천국군을 무찌르기 위해 ‘상첩군(常捷軍)’을 조직했다. 상첩군은 서양 무기로 무장하고 프랑스 군관을 지휘관으로 삼은 군대다. 서양의 총포를 구입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이를 조달해준 사람이 바로 호설암(胡雪巖, 1823~1885)이다.

호경여당 중약박물관의 호설암 초상
시대의 풍운아, 영화와 같은 인생
상성(商聖)으로 칭송되는 호설암의 인생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 열둘에 아버지를 잃은 그는 어린 나이에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항저우의 어느 전장(錢莊)에 사환으로 들어간 그는 스물일곱에 그곳의 주인이 된다. 이후 항저우 제일의 거부로 성장한 호설암은 마침내 청나라 최고의 부자가 된다. 물론 그는 성실하고 장사수완도 뛰어났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든든한 배후가 성공의 가장 큰 동력이었다. 그 배후가 바로 좌종당이다.
항저우 수복을 위해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군자금이 절실했던 좌종당에게 호설암은 든든한 돈줄이었다. 한편 호설암에게 좌종당은 든든한 뒷배였다. 승승장구하는 좌종당을 도우며 호설암의 사업도 성공가도를 달렸다. 항저우에 있는 호설암의 저택은 그가 전성기를 누리던 당시 3년(1872~1875)에 걸쳐 지은 것이다. 당시 그의 부강(阜康)전장은 20여 곳이 넘는 곳에 지점이 있을 정도로 성업 중이었다. 호설암은 분명 자손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채 10년도 되지 않아 파국이 찾아온다. 아주 급작스럽게.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악재가 겹쳐서 일어났다. 1882년, 호설암은 비단을 만드는 데 필요한 생사를 죄다 사들인다. 당시 생사 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서양 상인과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호설암은 생사 가격을 높게 책정하고 그 이하로는 절대 내놓지 않았다. 생사 가격이 올라가는 건 시간문제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급기야 중국 내 생사 가격이 런던 교역소의 생사 가격보다도 비싼 상황이 벌어졌다. 서양 상인들은 버티기에 돌입했다. 이듬해 뜻밖에도 이탈리아의 생사 생산량이 급증한다. 생사 가격은 계속해서 떨어졌다. 게다가 생사는 오래 보관하기도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호설암은 매점했던 생사를 헐값에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손해는 막심했다. 바로 그해(1883)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놓고 청나라와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좌종당은 조정의 명을 받고 전쟁에 투입되었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호설암을 무너뜨리기 위해 이홍장(李鴻章)이 나선다. 좌종당의 적수 이홍장은 좌종당을 치기 위해서는 먼저 호설암을 제거해야 한다고 늘 생각해오던 터였다. 때마침 호설암이 좌종당의 군비 조달을 위해 외국은행으로부터 대출받은 자금의 상환일이 임박했다. 사실 이 대출금은 청나라 정부가 각 지방으로부터 군비를 걷어서 갚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홍장은 걷힌 자금을 묶어둔 채 일부러 호설암에게 지급하지 않았다. 호설암은 나중에 받으리라 믿고 우선 자신의 전장에서 자금을 조달해서 대출금을 상환했다. 부강전장의 잔고가 이렇게 줄어든 상황에서 이홍장은 최후의 일격을 가한다. 고액 예금주들이 호설암의 전장에서 예금을 인출하도록 한 것이다. 생사로 많은 적자가 났고 대출금 상환으로 전장의 잔고도 부족한 상황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졌으니, 다음 수순은 뻔했다. 맡긴 돈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너도나도 전장으로 몰려들었다. 뱅크런, 즉 단기간의 대량 예금 인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1883년 12월, 각지의 부강전장이 잇달아 문을 닫고 호설암은 파산하고 만다. 손쓸 틈조차 없이 너무도 급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다.

호설암이 살았던 저택
정경유착의 전형 가산까지 몰수당해
이게 끝이 아니었다. 조정에서는 호설암이 공금으로 사적 이익을 취한 죄까지 추궁했다. 일찍이 그가 좌종당의 군비 조달을 위해 외국은행으로부터 대출받으면서 화근을 심었던 것이다. 당시 호설암은 실제 대출이자보다도 훨씬 더 많은 액수로 조정에 거짓 보고하고 그 차액을 챙겼다. 조정을 기만한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삭탈관직과 가산 몰수는 물론이고 참형을 받아야 마땅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체포되기 직전에 호설암은 세상을 떠났다. 이때가 1885년 11월, 예순셋이었다. 공교롭게도 호설암이 죽기 바로 두 달 전에 좌종당이 병사했다.
호설암의 성공과 몰락은 정경유착의 전형이다. “장사를 하려면 기댈 사람이 있어야만 하니, 권력이 있으면 이익도 있다”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좌종당이라는 권력에 기대어 비상했던 호설암, 결국 그는 이홍장이라는 권력에 의해 날개 없이 추락했다. 호설암은 파산한 뒤 최대한의 냉정함을 유지하며 뒷수습을 했다. 그는 채권자를 세 등급으로 나눴다. 권세가와 소액 채권자의 돈은 갚아주고, 나머지는 미뤄두었다. 권세가의 돈을 갚지 않으면 자손에게 해를 끼칠 우려가 있고, 근근이 생활하는 소액 채권자의 돈은 차마 떼어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호설암은 파산에 직면해서도 재산을 은닉하지 않고 2년에 걸쳐 최선을 다해 뒷수습을 했다. 그가 사망한 뒤, 조정의 명을 집행하러 항저우지부(知府)가 가산을 몰수하러 집으로 들이닥쳤을 때는 채무를 변제하느라 남은 재산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다.
홍정상인(紅頂商人), 상인으로서 고관에 봉해진 호설암을 가리키는 말이다. 홍정은 청나라 고관이 쓰던 모자다. 호설암은 공신에게만 주어지는 황색 마고자인 황마궤까지 걸치며 최고의 부와 명예를 누렸다. 호설암이 홍정상인이 될 수 있었던 시대 상황은 무엇일까? 당시 청나라는 근대화 운동인 양무(洋務)운동을 추진 중이었다. 호설암은 양무운동의 주도자인 좌종당을 도와 중국 자체의 군함 생산 기지인 푸저우선정국(福州船政局)을 세웠고, 기계 모방직 공업의 시초가 되는 란저우직니국(蘭州織?局)을 세웠다. 또한 서양의 기계와 신무기를 들여오고 외국 기술자를 초빙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열강의 먹잇감으로 전락한 청나라는 구심력이 약화될 대로 약화된 상황이었다. 태평천국이 중국 남부를 대부분 차지한 이때 좌종당은 이를 진압하는 데 앞장섰고, 호설암은 그를 전면적으로 도왔다. 또한 신장(新疆) 지역에서는 야쿱 벡이 독립국을 세웠는데, 이를 무너뜨린 이도 좌종당이다. 당시 소요된 자금과 군량과 무기 역시 호설암이 조달했다. 외우내환의 시대 상황, 시대를 주름잡던 실력자와의 결탁, 호설암은 이렇게 그 시대의 풍운아가 되었다.
“관리가 되려면 증국번을 읽고, 상인이 되려면 호설암을 읽으라”는 말이 있다. 무일푼에서 시작해 중국 최고의 부자가 된 인물이니, 이런 말이 생길 법하다. 게다가 역사의 굵직한 순간에 큰 역할까지 했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데 ‘호설암’이라는 이름 석자를 역사 속에, 그리고 사람들 기억 속에 각인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이런 게 아니라 ‘호경여당(胡慶餘堂)’이라는 약국이다.
인술, 품질, 정직 내세운 ‘호경여당’ 남겨

호설암이 쓴 ‘계기’ 편액
“북쪽에는 동인당(同仁堂), 남쪽에는 호경여당”이라는 말처럼 호경여당은 중국의 대표적인 약국으로, ‘강남약왕(江南藥王)’이라 불린다. 호설암이 파산한 뒤 호경여당의 주인은 바뀌었지만 그 이름과 전통은 계속 이어졌다. 호경여당은 1999년에 현대식 설비를 갖춘 ‘항저우 호경여당 약업(藥業) 유한공사’로 거듭났다. 본래 호경여당 건물은 현재 ‘호경여당 중약(中藥)박물관’이 되었다. 호경여당을 이끈 정신이 무엇이었는지, 이곳에 남은 흔적들을 통해 알아보자.
첫째, 인술(仁術)을 베푼다는 정신이다. 어진 기술을 의미하는 ‘인술’은 의술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어진 덕을 베푸는 방법도 인술이라고 한다. 호경여당의 문루(門樓)에는 ‘시내인술(是乃仁術)’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이 바로 인을 행하는 방법이다”,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제나라 선왕(宣王)이 제사용으로 끌려가는 소를 보고 양으로 바꾸게 한다. 백성들은 왕이 소가 아까워서 양으로 바꾼 것이라 생각하고 비난했지만 맹자는 오히려 그것이 “바로 인을 행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왕이 소의 애처로운 모습을 직접 보았기에 차마 죽게 둘 수 없었다는 것이다.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연민, 맹자는 바로 이것을 인의 기본이라고 여겼다. 호경여당 문루에 새겨진 ‘시내인술’은 타인의 고통을 덜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이다. 호설암은 가난한 이에게 무료로 구급약을 제공하고, 전염병 같은 재난이 발생한 지역에 무료로 약재를 공급하고, 군대에 필요한 약은 원가만 받고 팔았다. 이러한 나눔의 실천이야말로 호설암이 역사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는 원천이 되었다.
둘째, 가격이 아닌 품질을 우선하는 정신이다. 호경여당의 대청에는 ‘진불이가(眞不二價)’라고 적힌 편액이 걸려 있다. “진짜 물건이니 두 가지 가격(에누리)은 없다”, 즉 품질을 보증하되 절대 에누리는 없다는 게 호경여당의 경영 원칙이었다. ‘진불이가’는 한나라 때의 한강(韓康)한테서 유래한 말이다. 한강은 직접 산에 올라가 약을 캐어서 팔았는데, 절대 약값을 흥정하는 일이 없었다. 그 값어치를 하는 약이었기 때문이다. 호설암은 최고 품질의 약재를 확보하기 위해서 각 약재의 산지로 직접 사람을 보내 구매하는 방법을 썼다. 또한 그는 가격 경쟁을 벌이지 않았다. 경쟁 약국이 가격 인하 정책을 썼지만 호설암은 오히려 ‘진불이가’라는 편액을 호경여당의 대청에 내걸었다. “진짜 물건이니 에누리는 없다”는 말은, 에누리가 있다면 진짜 물건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가격 경쟁을 하게 되면 품질을 보증하기 어려워진다. 호설암의 ‘진불이가’ 정책은 호경여당을 신뢰할 수 있는 브랜드로 만들었다.
셋째, 정직을 근본으로 하는 정신이다. 광서(光緖) 4년(1878)에 호설암이 직접 쓴 ‘계기(戒欺)’ 편액은 일종의 사훈(社訓)이다. ‘계기’란 속임수를 경계한다는 의미다. 계기 편액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릇 모든 장사에는 속임수가 개입되면 안 된다. 약업은 생명과 관계된 것이니 더더욱 속여서는 안 된다. 나는 세상을 구제하는 데 마음을 두었으니, 결코 나쁜 제품으로 큰 이익을 취하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제군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참된 약재를 구하는 데 힘쓰고 훌륭한 약을 만드는 데 힘쓰길 바란다. 자신을 속이지 않고 세상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면 하늘이 복을 주실 것이다. 그러니 제군의 선함은 나를 위해서도 좋고 각자를 위해서도 좋음이라.”
이러한 정신이 담긴 ‘호경여당’의 이름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 “적선지가(積善之家), 필유여경(必有餘慶)”이라는 <주역>의 구절에서 ‘경여당(慶餘堂)’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는 <주역>의 말은 선을 쌓으면 자손에게 복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다. 호설암이 호경여당을 세운 건 1874년, 바로 새 저택을 만들던 당시다. 호설암이 파산한 뒤 그 많던 재산도 사라지고 호화로운 저택도 자손에게 남겨주지 못했지만, 호경여당을 통해 실천한 선행만큼은 결코 인멸되지 않았다. 호설암은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조용히 사라졌다. 삭탈관직에 재산 몰수를 당하고 채권자도 수두룩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00여년이 지난 1990년대에 호설암의 무덤을 찾아내 보수한 이들은 바로 호경여당의 직원이었다. 2006년에 ‘호경여당 중약 문화’는 국가급 비(非)물질문화유산에 들어갔다. 호설암의 인생에 호경여당이 없었다면? 공수래(空手來) 공수거(空手去)의 인생, 이를 유의미하게 만들어주는 건 과연 무엇일까? 호설암의 인생은 이에 대한 훌륭한 지침 중 하나로서 참고할 만하지 않은가.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