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는 북중국을 금나라에 내주고 그 옛날 오월의 수도 항저우로 천도한다. 북중국의 수복을 염두에 두었기에 항저우는 임시 수도일 수밖에 없었다. 남송은 항저우 덕분에, 그리고 항저우는 남송 덕분에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된다.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쑤저우(蘇州)와 항저우(杭州)가 있다.” 송나라 범성대(范成大)의 <오군지(吳郡志)>에 기록된 말이다. 지상의 천당에 비유된 쑤저우와 항저우는 강남, 즉 창장(長江) 중하류 이남을 대표하는 곳이다. 당나라 때부터 강남은 종종 천당에 비유되었다. 당나라 시인들은 이렇게 노래했다. “사람들은 그대가 강남에서 왔다고 하는데, 나는 그대가 천상에서 왔다고 하겠네.”(임화(任華), 회소상인초서가(懷素上人草書歌)) “다들 강남이 좋다고 말하니, 나그네는 마땅히 강남에서 늙어가야지.”(위장(韋莊), 보살만(菩薩蠻) ‘다들 강남이 좋다고 말하니’) 풍요로움과 아름다움, 바로 이것이 강남 특히 쑤저우와 항저우를 인간세상의 천당에 비유한 이유다. 지금부터 둘러볼 곳은 바로 오늘날 저장(浙江)성의 성회인 항저우다.
금나라에 빼앗긴 카이펑 수복 염원 담아
일찍이 항저우를 찾은 외국인의 눈에도 이곳은 풍요로움과 아름다움 자체였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의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킨사이가 세상에서 가장 당당한 최고의 도시라는 것은 분명하다”고 했다. <동방견문록>을 비롯해 13세기 후반 서양의 책에는 항저우가 ‘킨사이(Quinsay)’로 표기되어 있다. 킨사이는 ‘행재(行在)’를 소리나는 대로 옮긴 것이다. 왜 항저우를 행재라고 했던 것일까? 행재란 황제의 임시 거처를 의미한다. 정강(靖康)의 변(1126~1127)으로 북송이 금나라에 멸망당한 뒤, 남송 정권은 항저우에 임안부(臨安府)를 설치하고 이를 행재로 삼았다. 남송 사람들에게 항저우는 임시로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곳이었을 뿐이다. 그들 마음속에서 수도는 여전히 카이펑이었다. 남송 사람들이 항저우를 행재라고 부른 데는 빼앗긴 고토(故土)를 수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
남송의 항저우를 이야기하자면 금나라로 잡혀간 북송의 휘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예술 천재, 정치 바보’였던 휘종은 자신의 거처를 예술적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황허 유역의 카이펑에 창장 유역의 강남을 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만든 정부 기관이 바로 쑤저우와 항저우에 설치되었던 쑤항조작국(蘇杭造作局)과 쑤항응봉국(蘇杭應奉局)이다. 쑤항조작국은 각종 희귀한 동식물과 금은보화를 재료로 황실 전용 공예품을 만들어서 궁중에 진상하던 기관이다. 쑤항응봉국은 ‘간악(艮岳)’이라는 황실 원림을 조성하기 위해서 강남의 기이한 꽃과 돌을 전문적으로 수집하던 기관이다. 쑤항응봉국에서 수집한 진귀한 꽃과 돌은 강남에서 카이펑까지 수로를 통해 운송되었다. 꽃과 돌을 운송하는 배 열 척을 하나의 ‘강(綱)’으로 편제했기 때문에 이 운송조직을 화석강(花石綱)이라고 불렀다. 수많은 백성이 화석강에 동원되었고, 심지어는 자식을 팔아서 그 비용을 대는 경우도 있었다.

서호십경의 하나인 ‘뇌봉석조’
쑤저우와 항저우로 대표되는 강남의 물적·인적 자원은 이렇게 황제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수탈’되었다. 결국 북송은 멸망하고 휘종은 금나라로 잡혀갔다. 아이러니하게도 북송의 멸망으로 인해 남송의 황제들은 ‘진짜’ 강남 항저우에서 살게 된 것이다.
남송 이전 항저우를 수도로 삼았던 나라는 오대십국 시기 10국 중 하나였던 오월(吳越, 907~978)이다. 소국이었던 오월은 시종일관 사대(事大)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오월을 세운 전류는 일찍이 당나라 때 월왕에 봉해졌다가 다시 오왕에 봉해졌고, 후량이 들어선 뒤 오월왕에 봉해졌다. 이후 후당 때도 그는 칭신(稱臣)하며 오월왕에 봉해졌다. 하지만 오월은 다섯 번째 왕 전홍숙에 이르러서 끝이 나고 만다. 일찍이 조광윤이 남당을 치려고 했을 때 남당의 후주 이욱(李煜)이 오월에 원조를 청했지만 오월은 이를 거절했고 남당은 멸망했다. 남당과 오월은 순망치한의 관계였다. 결국 남당이 망하고 4년이 지난 뒤 오월 역시 송나라에 병탄되고 만다. 그리고 150년 뒤, 오대십국을 통일했던 송나라는 북중국을 금나라에 내주고 그 옛날 오월의 수도 항저우로 천도한다. 북방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한 곳이긴 하지만, 북중국의 수복을 염두에 두었기에 항저우는 임시 수도일 수밖에 없었다. 남송 사람들에게 항저우는 수도가 되기에는 지리적 균형을 갖추지 못한 곳, 남쪽에 치우친 변두리였다. 그렇게 항저우는 기껍지 않게 남송의 수도가 되었다. 남송과 항저우의 만남은 마뜩잖은 것이었으나 남송은 항저우 덕분에, 그리고 항저우는 남송 덕분에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된다.
민간설화 ‘백사전’의 탄생과 뇌봉탑
인간세상의 천당, 그곳은 인간세상도 아니고 천당도 아닌 회색지대다. 그러고 보면 ‘백사전(白蛇傳)’이라는 민간전설이 탄생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 바로 항저우다. 백사전은 쉬커(徐克) 감독의 <청사(靑蛇)>(1993), 청샤오둥(程小東) 감독의 <백사전설>(2011) 등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백사전은 남송 때부터 이야기로 전해지다가 청나라 풍몽룡(馮夢龍)의 <경세통언(警世通言)>에 기록되었다.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송 소흥(紹興) 연간, 항저우에 허선(許宣)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비 오는 어느 날, 그는 서호(西湖)에서 백낭자(白娘子)를 만나게 된다. 이후 두 사람은 부부가 된다. 그런데 법해(法海)라는 승려가 허선에게 백낭자가 뱀의 요괴임을 알려준다. 법해는 허선에게 바리때를 주고, 허선은 바리때로 백낭자의 머리를 덮어 그 안에 그녀를 가둔다. 법해는 바리때를 뇌봉사(雷峰寺) 앞으로 가져와 바닥에 놓고 그 위에 탑을 쌓게 한다. 그 탑이 바로 뇌봉탑이다.
뇌봉탑은 서호의 상징이자 랜드마크다. 서호십경의 하나인 ‘뇌봉석조(雷峰夕照)’는 석양에 물든 뇌봉탑과 그 일대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말이다. 백낭자가 탑 아래 깔려 있는 이야기를 떠올리면 뇌봉석조는 아름답다기보다 비극적이다. 뱀의 요괴인 백낭자는 허선을 사랑했지만 허선은 결국 그녀가 사람이 아님을 알고 사랑을 배신했다. 사실 백사전은 <경세통언>에 기록된 내용 외에도 많은 내용이 덧붙고 원래 내용도 바뀌면서 다양한 버전으로 변주되었다. 그 과정에서 백낭자는 요괴의 성격보다는 허선을 향한 일편단심이 부각되었다. 허선 역시 백낭자가 뱀의 요괴임을 알고서도 사랑을 지키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둘의 애정이 해피 엔딩이길 바라는 대중의 바람이 그렇게 전설을 바꾸어나간 것이다. 그 결과 사랑의 방해꾼인 법해는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어떤 버전에서는 백낭자의 동생 청사에게 쫓긴 법해가 게 껍질 속으로 숨어들어갔다고 한다.
뇌봉탑은 오월의 왕 전홍숙 때 세워진 것이니, 백사전의 배경인 남송과는 시간상 불일치한다. 하기야 전설을 역사와 꿰맞추려는 게 어불성설일 것이다. 그래도 뇌봉탑의 붕괴라는 역사적 사건을 언급하기 위해서는 전설부터 이야기할 수밖에 없겠다. <경세통언>에서 법해는 백낭자를 뇌봉탑 아래에 가둔 뒤 이렇게 외쳤다. “뇌봉탑이 무너져야만 백사가 세상 밖으로 나오리라!”

백낭자와 허선이 만나는 장면. 뇌봉탑 내부의 목각.
1924년 9월 25일, 뇌봉탑이 무너졌다! 중국의 대문호 루쉰(魯迅)은 뇌봉탑이 무너진 사건에 대해 두 편의 글을 남겼다. 뇌봉탑이 무너진 다음 달에 발표한 글(論雷峰的倒掉)에서 루쉰은 어렸을 때 할머니로부터 들었던 백사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뇌봉탑이 무너지길 바랐던 당시의 마음을 추억한다. 훗날 그 탑이 오월의 왕이 지은 것이고 탑 안에 백사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뇌봉탑이 무너지길 바라는 마음은 여전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뇌봉탑이 무너진 것이다. 머리가 이상한 사람이 아닌 바에야 다들 백사를 위해 분개하고, 쓸데없는 일을 저지른 법해를 책망할 것이라는 게 루쉰의 생각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승려는 본래 독경에 전념해야 마땅하다. 백사가 허선에게 반하고 허선이 요괴를 아내로 삼은 게 남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법해가 굳이 불경을 내려놓고 멋대로 분쟁을 일으킨 것은 아마도 질투심 때문일 것이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루쉰은 법해가 결국 게의 껍데기로 숨은 이야기를 하면서, 게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가 그 안에 계속 갇혀 있으리라 조소한다.
이 글이 뇌봉탑과 얽힌 전설에 관한 것이라면, 이듬해에 발표한 두 번째 글(再論雷峰的倒掉)은 뇌봉탑이 무너진 역사적 사건을 통해 중국의 국민성을 통렬히 비판한 글이다. 글은 뇌봉탑이 무너진 원인부터 이야기한다. 뇌봉탑의 벽돌을 집에 두면 모든 일이 평안하고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미신 때문에 오랜 세월 사람들이 야금야금 빼내간 결과 탑이 무너진 것이다. 이것도 통탄할 일이지만 루쉰의 비판은 뇌봉탑이 무너진 것을 두고 “서호십경에서 하나가 모자라게 되었다”고 탄식하는 사람들을 향한다. 루쉰은 10에 대한 중국인의 집착을 꼬집으며, 서호십경에서 하나가 빠졌으니 십경병(十景病)에 걸린 이들이 다시 그것을 채워놓으리라고 예언한다. 그는 바로 여기에 비애가 존재한다고 단언한다. 그의 비애는 새로운 건설을 위한 진정한 파괴의 부재에서 비롯된 비애다. 루소·슈티르너·니체·톨스토이·입센, 이들은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말끔히 쓸어버렸다. 오래된 벽돌을 집으로 가져오거나 팔아넘길 생각 따위는 결코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는 이런 이들이 없고, 설령 있다 한들 대중들의 침에 익사할 거라는 게 루쉰의 생각이다.
“비극은 인생의 가치 있는 것을 파멸시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고, 희극은 인생의 무가치한 것을 찢어발겨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인데, 이러한 비장함과 익살은 바로 ‘십경병’의 적이다. 양자 모두 파괴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중국에 십경병이 존재하는 한 루소와 같은 이는 결코 탄생할 수 없다고 꼬집으면서 루쉰은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1910년대의 뇌봉탑. 시드니 데이비드 갬블(Sidney David Gamble) 촬영.
앞서 깨달은 내부의 파괴자가 없으면, 외부의 광포한 강도가 파괴자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외부로부터의 파괴보다 더 심각한 것은 평소에 내부에서 작동하는 노예적 파괴다. 루쉰은 뇌봉탑을 무너뜨린 사람들을 중화민국의 기둥과 주춧돌을 날마다 몰래 파내는 노예에 비유했다. 그저 눈앞의 작은 이익을 취하고자 야금야금 벽돌을 훔쳐간 결과 뇌봉탑 전체가 무너졌다. 뇌봉탑의 무너짐은 ‘노예적 파괴’였던 것이다. 따라서 진정 슬픈 일은 탑의 잔해가 아니라 예전과 똑같이 탑을 복구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노예적 파괴를 되풀이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쉰은 이상을 품은 혁신적 파괴자가 필요하다고 외친다. 또한 혁신적 파괴자를 도적이나 노예와 구별할 것을 주문한다. 아무리 선명하고 보기 좋은 깃발을 내걸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빙자해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조짐이 있는 자는 도적이고, 그것을 빙자해 눈앞의 작은 이익을 챙기려는 조짐이 있는 자는 노예다.
루쉰의 예언대로 다시 세워진 뇌봉탑
루쉰의 예언은 들어맞았다. 뇌봉탑은 다시 세워졌다. 2002년에 낙성식을 마친 뇌봉탑은 다시 석양에 아름답게 물들었고, ‘서호십경’은 다시 완성되었다. 이제 뇌봉탑이 무너질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예전처럼 탑의 벽돌을 갈거나 빼낼 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럴 수가 없다. 21세기에 세워진 뇌봉탑은 동탑(銅塔)이니까. 뇌봉탑 위에 올라가면 아름다운 서호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수도 있지만 층층마다 볼 것이 있으니 찬찬히 살펴보며 올라가는 게 좋다.
뇌봉탑은 이제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하지만 죄 없는 백낭자를 응징하고자 했던 법해의 무자비함, 근본이 무너지는 줄도 모른 채 눈앞의 작은 이익에 급급한 노예근성은 오히려 시공간을 초월해 지금도 우리 인간을 좀먹고 있는 듯하다. 리루이(李銳)는 백사전을 모티프로 쓴 소설 <인간세상>에서 인간이 되길 갈망했던 뱀 백소정(白素貞)이 끝내 인간이 되지 못한 이유를 ‘인간의 잔인함’을 갖추지 못해서라고 풀어낸다.
2999년 동안 수련하던 그녀가 인간의 비명소리를 듣고 도와주려다가 3000년의 수련을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비명소리에 눈감았다면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었다! 결국 그녀는 완전하지 못한 인간으로 인간세상에서 배척당하며 살아가다가 비극적으로 죽는다. 이유는 단 하나, 그녀가 인간과 ‘다른 존재’였기 때문이다. 법해는 요괴가 인간세상에서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만물이 불성을 지니고 있거늘 무엇이 인간이고 무엇이 요괴인가?”라는 백소정의 말은 법해로 대표되는 인간의 허위의식과 배타심을 여지없이 까발린다. 요괴를 없애려는 스님이 정의인가? 사람을 살리려는 요괴가 정의인가? 뇌봉탑에 오르거든, 껍데기만 보는 이 세상에 대한 일갈을 마음의 귀로 들어보자. 그렇다면 뇌봉탑의 재건을 극구 반대했던 루쉰일지라도 21세기 뇌봉탑의 존재를 기꺼이 인정하지 않을까. 껍데기 너머 본질을 보는 것은 루쉰이 말한 혁명적 파괴와 같은 맥락이리라. 그 위의 새로운 건설이야말로 인간세상의 천당에 다가가는 길일 터.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