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 웨잇…>-친구를 잃은 아이들의 슬픔과 죄책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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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이 많은 목숨을 한꺼번에 잃었던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만큼 우리 곁에 무방비 상태에서 ‘어른의 세계’로 떠밀린 아이들이 있다. 그 죄책감을 짊어지고 살아야 할 젊음을 가늠하려니 두렵다.

때때로 진료실에서 “꿈을 너무 많이 꾼다”며 고충을 토로하는 분을 만나면 안타깝다가도 그 생생한 내용 설명에 놀라곤 한다. 명색이 ‘정신과 의사’인데 특별히 기억하는 꿈은 몇 안 된다. 그 중 하나를 조심스레 떠올려본다. 더운 여름날 한 친구를 사고로 멀리 떠나 보냈었다. 심장마비였다. 보충수업을 마치고 오후에 가까운 연못으로 물놀이를 갔던 친구는 돌아오지 않았다. 장례를 치른 날 밤이었다. 꿈 속에 그 친구가 나왔다. 다른 아이들과 학교에서 놀고 있는데, 불쑥 고개를 내민 친구는 “왜 이렇게 빨리 포기했냐”고 살짝 원망의 말을 던졌을 뿐 여느 때와 똑같은 얼굴을 했다. 우리는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친구는 어떻게 무덤을 나와 버스를 타고 다시 학교까지 걸어 왔는지를 모험담처럼 풀어내었다. 무척 부끄러웠다. ‘왜 그렇게 서둘러 보냈을까’ 내 자신이 한심해서 말을 붙일 수 없었다. 그 뒤로는 꿈으로라도 친구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헤이, 웨잇… >의 한국어판 표지

<헤이, 웨잇… >의 한국어판 표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책의 말들
처음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는 친구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몰랐다. ‘무슨 말썽이 있었길래 학교에 연락이 왔을까’라는 생각에 다른 친구들과 “뭐 하러 거기까지 수영은 하러 가서”라는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난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도 그다지 슬퍼하지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친한 친구의 죽음 앞에 무감각한 스스로의 모습이 죄스러웠다. 주변에서 “네가 영정 사진을 들어야 하지 않겠냐”는 말도 있었지만 선뜻 나설 수 없었다. 장례식장을 지킨 이유가 친구로서 의무감이었는지, 친구라 말하기 힘든 죄책감이었는지 여전히 모르겠다. ‘연못에 같이 갔어야 했나.’ ‘같이 가지 않았으니 내 책임은 없나.’ ‘왜 가는 것을 말리지 않았나.’ ‘가장 친하다고도 생각했는데 요즘 왜 같이 다니지 않았나.’ ‘왜 나는 슬퍼하지 못하고 멀쩡히 먹고, 자고, 웃을 수 있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책의 말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성인이라고 다르지 않지만 성장 과정의 아이들은 가까운 이의 죽음에 강한 죄책감을 느낀다. 많은 경우 그 죄책감은 타당하지 않고 정당하지 않다. 자책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도 모든 불행의 씨앗이 자신에게 있는 것 같아 죽음의 원인을 자신의 행동에서 찾는다. 도덕의 근원이 된다는 우리 마음속 초자아는 유독 아이들에게 가혹한 법이다. 더구나 어린 시절의 친구는 우리가 처음으로 가족을 벗어나 같은 눈높이에서 애착을 갖게 된 대상이다. 친구의 죽음은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내 존재를 뒤흔들 수 있다.

노르웨이의 작가 제이슨은 <헤이, 웨잇…>에서 아련한 그림체와 절제된 대사를 통해 어린 시절의 친구를 소환한다. 단짝 친구 욘과 비욘은 청소년기의 특권이라는 ‘권태’를 나누는 사이다. 수업을 듣느니 배트맨을 그리고, 의미 없는 농담 따먹기에 하루를 다 쓴다. 엄마 심부름은 큰소리가 나기 전까지 미루는 것이 당연하다. 성에 대한 호기심은 소문만으로 누군가를 몹시 부러워하게 만든다. 연줄이 끊어져 연이 날아가버리면 익룡 프테라노돈이 물어갔을 뿐이다. 좋아하는 여자아이 잉그리드의 이름을 슬쩍 입에 올려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주고, 창피한 마음에 급히 화제를 돌려도 모른 척해 주는 게 친구다.
이들 둘에게 비친 어른이 사는 세계는 긴 장대다리에 매달려 아슬아슬하게 걷는 삶이다. 두 친구의 작은 도발로도 어른들은 다리에서 추락해 쓰러질 것이다. 서로 평범한 어른의 삶은 살지 않겠다고, 가구나 그림을 사 모으느니 여행을 가겠다고, 신문기자나 만화가가 되겠다고 생각한다.

무료한 삶을 달래는 방법으로 욘은 비욘에게 ‘배트맨 팬클럽’을 제안한다. 가입 조건은 욘이 정한 테스트―절벽 끝에 서 있는 나뭇가지에 뛰어올라 매달린 다음, 다시 땅으로 돌아오는 일―를 통과하는 것이다. 비욘의 얼굴에 주저함이 보인다. 무섭다. 고민 끝에 어느 날 비욘은 결심한다. 배트맨 팬클럽이 되기로. 결행의 날. 수업이 끝나고 절벽에 선 두 친구. 긴장해서 땀을 비 오듯 흘리는 비욘에게 욘은 뭔가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헤이, 웨잇(Hey, wait)….” “잠깐만”이라고 말하는 찰나 비욘의 몸은 허공에 있다. 세상은 암흑이 되고, 사물은 정지하며, 비가 내린다. 비욘의 장례식에서 돌아오는 길에 욘은 좋아하던 잉그리드에게 위로의 말을 듣는다. “네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욘은 잉그리드를 뒤로 하고 ‘어른’이 된다.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세상은 이제 다를 것이다.

노르웨이 작가 제이슨의 만화 <헤이, 웨잇… >의 한 장면.

노르웨이 작가 제이슨의 만화 <헤이, 웨잇… >의 한 장면.

어른 욘은 평범한 삶을 산다. 일하고 싶지 않다던 공장에서 단순 작업을 한다. 축구 이야기를 하는 동료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고독하다. 이혼을 한듯 아이와는 통화만 하고 홀로 산다. 대신 악몽은 욘을 떠나지 않는다. 꿈 속에서 그 절벽에 자신이 홀로 서 있다. 처음 어른이던 모습은 어느 순간 아이로 바뀌어 있다. 발을 구르는 순간 나뭇가지는 온 데 간 데 없다. 추락한 욘을 향해 죽음은 손가락질하며 비웃는다.

지리멸렬한 일상이다.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새로운 일은 시도조차 못한다. ‘너무 늦었다’고 스스로에게 되뇌며 스스로를 속인다. 새로운 여인을 만나보아도 관계는 지속되지 않고 달라질 것은 없다. 테이블 위의 액자 속 사진에는 자책과 의기소침, 그리고 술에 빠져 있는 욘의 과거가 갇혀 있다. 우연히 길에서 행복해 보이는 잉그리드와 마주친 날, 욘은 다시 술을 마신다. 세상이 먼저인지 자신이 먼저인지 모르게 모든 것이 기울어진다.

깨어난 욘 앞에 죽음이 서 있다. 담담한 욘은 어눌한 말투로 읊조린다. “어쨌든… 내 인생은 기대와는 달랐어요…. 내가 값을 치르는 게 당연하겠죠. 만약 내가 나쁜 사람이었다면…. 하지만 난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는데.” 눈을 감은 욘에게 어린 시절 고향의 모습이 보인다. 어린 욘이 있다. 절벽도 그대로이다. 욘과 비욘은 즐겁게 축구를 하고 있다. 비욘이 골을 넣었다. 이제 욘은 죽음이 운전하는 버스에 올라탄다.

‘잊으라, 그만 자책하라’ 애써보지만…
친구의 죽음을 겪은 아이는 자책한다. 비욘이 먼저 움직였던 것일까. 욘의 목소리에 비욘이 움찔해서 사고가 났을까. 알 수 없다. 하여튼 아이는 자신이 대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될 뿐이다. 스스로를 용서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자신에게 행복할 자격을 주지 않는다. 준비 없이 어른의 세계로 내몰려 죽음을 의식하게 된 아이에게 세상이 저절로 온전해질 리 없다. 다들 그렇듯 결국 잘 살아가리라 믿는 것은 무모하다. 아이의 미래는 단축된다. 죽음이 멀리 있어 권태롭던 세상은 이제 죽음이 늘 함께 해서 무료해진다. ‘잊으라. 그만 자책하라.’ 애써 보지만 생각은 늘 제자리다.

잊을 수 없이 많은 목숨을 한꺼번에 잃었던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만큼 우리 곁에 무방비 상태에서 ‘어른의 세계’로 떠밀린 아이들이 있다. 그 죄책감을 짊어지고 살아야 할 젊음을 가늠하려니 두렵다. 책임 있는 우리 어른들이 회피하고 무관심할 동안 책임 없는 아이들이 오히려 자책하며 고통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남은 세월의 무게가 가벼운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의 짐을 간과하고 있었나 보다.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고 있지만 누군가는 악몽을 피할 수 없고, ‘내가 값을 치르긴 해야죠. 그런데 내가 그렇게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았는데’라는 혼잣말에서 헤어날 수 없다. 때로 우리는 친구를 잃은 아이들의 슬픔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회한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가슴속 깊은 곳의 알 수 없는 죄책감을 잘못된 방법으로 풀고 있는 것이리라.

우리 곁 어딘가엔 친구를 잃은 아이들이 있다. 어른들의 학대와 무관심, 어른들의 욕심과 무지 탓이다. 주변에 어린 ‘욘’이 있다면 이야기해주자. 네 잘못이 아니라고. 그리고 같이 슬퍼해주자. 또 이야기해주자. 만약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어른들의 몫이라고. 그리고 잘못을 바로잡는 모습을 보여주자. 아이들이 그런 어른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나쁜 사람은 아니며 자신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납득할 수 있도록. ‘욘’의 세상이 흔들리지 않도록 살짝 거들어준다면, 결국 혼자만의 힘으로 버텨낼 것이다.

<신재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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