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 마키나>-인공지능 때문에 훼손된 ‘사회적 자본’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인공지능이냐 아니냐는 어떻게 구분할까? ‘튜링의 테스트’가 있다.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컴퓨터가 인간처럼 자연스럽게 말해 컴퓨터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인공지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테스트다. 이세돌 9단은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고에 대해 “알파고가 사람처럼 두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9단을 4-1로 이긴 알파고는 바둑 성능은 인정받았지만 튜링의 테스트에서는 떨어진 셈이다.

알렉스 가랜드 감독의 <엑스 마키나>는 튜링의 테스트에 참여한 인간들이 인공지능에 되레 농락당하는 모습을 그린다. 세계 최고의 검색엔진 회사인 ‘블루북’에 근무하는 프로그래머 칼렙은 사내 추첨행사에서 1등으로 당첨된다. 상품은 회장인 네이든과 일주일간 회장의 비밀자택에서 보내는 것이다. 알고보니 네이든은 자신이 만든 인공지능 로봇인 에이바를 튜링 테스트할 인물로 칼렙을 택했다. 에이바는 매혹적인 모습의 여성 로봇이다.

[영화 속 경제]<엑스 마키나>-인공지능 때문에 훼손된 ‘사회적 자본’

엑스 마키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의 약자다. ‘기계를 타고 내려온 신(god from the machin)’이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는 극중 갈등이 고조될 때 하늘에서 내려온 신을 등장시켰다. 뜬금없이 나타난 신은 전지전능하게도 모든 갈등을 해결했다. 미래에는 인간을 능가하는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될 수 있다. 칼렙은 네이든에게 “생각하는 로봇을 만들었다면 인간의 역사가 아닌 신의 역사를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테스트가 진행될수록 칼렙은 에이바에게 빠져든다. 에이바도 칼렙을 정말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체하는 것일까. 에이바는 실험실에서 탈출하기 위해 자의식과 상상력, 통제력, 섹시함, 공감능력을 활용한다. 칼렙도, 네이든도 에이바의 진심을 가늠하기 어렵다. 에이바는 칼렙에게 “네이든을 믿지 말라”고 이간질한다. 반대로 네이든은 칼렙에게 “내가 너의 편”이라고 말한다. 칼렙은 이제 자기자신도 못 믿는다. 자신이 인공지능 로봇이 아닐까 하는 환상에 빠진다. 실험 참가자들의 ‘사회적 자본’이 심각하게 훼손되기 시작했다.

사회적 자본이란 제도, 신뢰, 규범, 네트워크 등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무형자산을 말한다. 물적·인적 자본과 함께 제3의 자본으로도 불린다. 특히 중요한 것이 ‘신뢰’다. 사회적 신뢰가 깊으면 혈연, 지연, 학연에 기대지 않는 공평하고 공정한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다. 상호 신뢰가 커지면 계약서나 변호사 없이 일을 할 수 있다. 거래비용이 대폭 줄어든다는 말이다. 시민의식이 높고 부정부패가 적고 인권이 잘 보장된 나라는 경제주체들의 자유로운 경쟁이 촉진돼 경제활동이 활발해진다. 세계은행 수석연구원인 낵과 키퍼에 따르면 사회적 신뢰도가 10% 상승할 때 경제성장률은 0.8% 증가한다. 또 딘서와 유슬란서의 연구를 보면 신뢰가 10% 증가하면 1인당 소득은 0.5% 증가한다. 미국의 정치학자인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저서 ‘트러스트’에서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달성하고 있는 국가는 거래비용을 줄이고 대규모 조직에서 구성원들로 하여금 서로 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이 풍부한 국가”라고 밝혔다.

세계 가치관 조사에 따르면 2000년 한국의 사회적 신뢰지수는 27.3점으로 1980년 초(38.0점)에 비해 많이 낮아졌다. 이는 덴마크(66.5점), 스웨덴(66.3점) 등 북유럽은 물론이고 일본(43.1점), 미국(35.8점)에도 크게 미치지 못한다. 한국행정연구원의 2015년 조사를 보면 경제·사회적 분배구조가 공정한가를 묻는 질문에 27.7%만 ‘공정하다’고 응답했다. ‘보수와 진보 간 이념갈등이 심하다’(86.7%)고 봤고, ‘정부와 국민 간 소통이 이뤄지고 있다’는 답은 21.8%에 그쳤다. 칼렙과 네이든 간 불신을 틈타 에이바가 본색을 드러낸다. 사회적 자본이 말라버린 사회의 끝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

영화 속 경제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