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선 여사 4주년 추모식, 달라지지 않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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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죽지 말라, 살아서 싸우자는 우리의 외침에도, 누군가가 세상을 버리고 있습니다. 아니 세상이 그들을 버리고 있습니다. 어머님의 말씀대로, 또 우리 유가족들의 소원인 혈육들의 뜻을 이어, 그들이 바라던 세상을 이루어 내는 것을, 아직껏 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9월 3일)은 이소선 어머니 돌아가신 지 4년이 되는 날,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 어머니 계신 곳은 완연한 가을빛이었다. 철 늦은 매미소리가 가끔 들리기는 해도 그렇게 그악스럽지 않았다.

지난여름은 정말 후덥지근하고 답답했다. 세월호 참사는 1년을 넘기고도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에 재발방지책 마련은커녕 대통령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600만명 이상의 서명과 유가족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천신만고 끝에 마련된 특별법은 위원회 구성과 시행령 마련에서부터 박근혜 정부의 조직적 방해 속에 걸레가 돼버렸다. 이렇게 국민 안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대책 마련의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린 가운데 세월호 참사의 재판인 메르스 사태를 맞게 됐다. 국가적 재난에 컨트롤타워도 없이 우왕좌왕하다가 수많은 무고한 생명과 계산하기조차 어려운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그렇게 내세우던 나라 체면도 처참하게 시궁창에 떨어졌는데, 최고책임자인 박근혜 대통령은 사과는커녕 그 흔한 유감표시 한마디도 없이 모든 책임은 국민에게 있다면서 노동개혁을 부르짖으며 노동자들에게 덤터기를 씌우고 있다. 만만한 게 노동자인가. 비정규직은 정책 부재 속에 자본의 탐욕으로 저희들이 다 만들어놓고, 정규직을 무슨 죄인처럼 몰아세우며 비정규직 몫을 내놓으라고 으르렁대고 있다.

9월 3일,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4주기 추도식’이 경기 마석 모란공원묘역에서 열렸다. / 이요상 제공

9월 3일,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4주기 추도식’이 경기 마석 모란공원묘역에서 열렸다. / 이요상 제공

이제 몇 명 남지 않은 전태일 친구들
어머니 묘소로 가는 길 왼쪽 언덕 위에는 문익환 목사님과 조영래 변호사가 있고, 오른쪽 언덕 위에는 김진균 교수님이 계신다. 이 골짜기 저 언덕에 누워 계신 수백의 열사님들이 어느 한 분 특별하지 않은 분들이 있을까만, 위의 세 분은 어머니 살아계실 때 혈육보다도 더 살갑게 지내시던 분들이다. 정말 천당이나 극락이 있다면 거기서도 함께 오순도순 노동자들의 삶을 걱정하며 이 가을날 하루를 보내고 계실 것 같다.

이소선 어머니 4주기 추모식은 따뜻한 가을 햇살 아래, 어머니와 태일이 묘를 중심으로 둘러선 많은 분들의 민중의례로부터 시작됐다. 이소선 합창단의 선창에 따라 함께 부르는 ‘님을 위한 행진곡’은 언제 불러도 우리들을 숙연하게 하며 새로운 다짐을 하게 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눈물 /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전태일이 떠난 지 올해로 45년, 어머니 가신 지도 4년이 됐다. 태일이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 항거할 때 함께했던 태일이 친구가 이제 몇 명 남지 않았다. 태일이 죽자 이소선 어머니를 친어머니처럼 모시고 평생을 제자리를 지켜온 분들이다.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이제 고아가 됐다며 슬피 울며 태일이와 어머니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분들이다.

그런데 봉제업 관련 사업을 하는 그 중 한 분이 제안을 해 왔다. 태일이 친구로 평생을 살면서 어떻게 하면 태일이의 뜻을 세상에 남길까 생각하다가, 우리나라에 노동자를 보내는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에 학교를 지어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관련 단체를 찾아 바로 시행에 들어갔다. 1억원 이상을 들여 캄보디아의 어느 마을에 멋진 학교를 짓고 있다.

또 한 친구는 얼마 전 나를 찾아와 10년 동안 적금을 부어 마련한 1억원을 장학금으로 썼으면 좋겠다며 내놓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태일이가 배움에 한이 돼 ‘대학생 친구 한 명만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겠냐며, 어머니도 살아계실 때 ‘돈 때문에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늘 말씀하셨다며, 그 한을 풀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우선 이 돈으로 꼭 필요한 장학사업을 시작하면 자기는 다시 10년 계획으로 또 1억짜리 적금을 붓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얘기해서 힘을 모아 장학재단이라도 만들어 보겠다며, 전태일재단에서 잘 관리해 달라는 것이었다.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이소선 여사의 사진.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전태일 열사의 장례식에서 오열하는 이소선 여사. /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이소선 여사의 사진.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전태일 열사의 장례식에서 오열하는 이소선 여사. / 경향신문 자료사진

모자의 ‘손잡음’ 정신을 계승 다짐
저쪽 언덕으로부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추모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어머님 가신 뒤 세상은 더 혼란스럽고 험악해져서, 어디를 보아도 희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캄캄한 세상이 됐습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이어지며, 노동자 민중의 삶은 끝없는 깊은 구렁텅이로 빠졌습니다. 오늘도 ‘제발 근로기준법이라도 지켜라’고 외치며,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쫓겨나와 거리를 헤매고 있고, 엄청난 손배·가압류를 견디다 못해 광고탑 위로, 크레인 위로, 목숨을 걸고 하늘로 오르고 있습니다.…>

전태일재단 이사장에 이어 유가협 장남수 회장이 흐느끼듯 절규한다.

<…어머님, 죄송합니다. 더 이상 죽지 말라, 살아서 싸우자는 우리의 외침에도, 누군가가 세상을 버리고 있습니다. 아니 세상이 그들을 버리고 있습니다. 어머님의 말씀대로, 또 우리 유가족들의 소원인 혈육들의 뜻을 이어, 그들이 바라던 세상을 이루어 내는 것을, 아직껏 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머님, 우리 유가협 회원들은 불의하고 오만한 박근혜 정권을 어머님의 뜻에 따라 몰아내는 데 앞장설 것을 다짐합니다.…>

한국노총 김동만 위원장이 뒤를 잇는다. 김동만 위원장은 어머님 살아계실 때 어머님과의 사이가 남달랐던 터라 더욱 애잔하다.

<…어머니, 참으로 어렵습니다. 지속되는 고용불안, 청년실업, 사회 양극화로 우리 사회는 점점 보수화되고 있습니다. ‘함께 살자’는 우리 노동자들의 외침은 일개 이익집단의 요구로 치부되고, 무한경쟁의 논리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적 정서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소수 권력과 자본을 독점한 자들에게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기회요, 가진 것은 몸뚱이밖에 없는 우리 노동자에게는 참으로 혹독한 시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이 나설 차례다. 그런데 정부의 탄압으로 수배 중이라 수석부위원장이 대신 읽는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바깥에서 신음하고 울며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으려 합니다. 오히려 자꾸만 더 바깥으로 내치기만 합니다. 전태일과 이소선의 정신은 ‘손잡음’이었습니다. 위를 보지 않고 아래를 보며 한 점 불꽃이 된 전태일 열사의 정신, 억압받고 신음하고 절규하는 곳을 향해 쉼없이 손을 내밀었던 이소선 어머니의 정신, 그 정신을 따라 더욱 분투하겠습니다.…>

어머니의 소원대로 한국노총, 민주노총, 시민단체 등이 하나 되어 만든 이소선 합창단의 아름다운 선율이 어머니의 목소리가 되어 더 낮은 곳으로, 탄압이 있는 곳으로, 차별이 있는 곳으로, 소외가 있는 곳으로, 분열이 있는 곳으로, 착취가 있는 곳으로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이수호 갈등해결센터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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