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 발표’가 이사회보다 우선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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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사건에 대해서는 총수의 전횡과 전근대적인 지배구조가 주로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재벌 총수가 ‘손가락 지적’으로 이사 목숨을 맘대로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장면 1> 지난 7월 27일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은 일본 롯데홀딩스에 친족 5명과 나타나 ‘손가락’으로 일본 롯데홀딩스 이사들을 지적하며 ‘이사 해임’의 의사표시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손가락 지적’의 의사표시를 받은 6인의 이사 중에는 신동빈 롯데 회장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이튿날인 7월 28일 일본 롯데홀딩스는 이사회를 열어 오히려 신 총괄회장을 내쫓았다. 어제의 이사회는 정식 이사회가 아니었고, 오늘 이사회가 정식 이사회라는 것이 그 논거였다. 아버지는 상법을 안 지키며 전횡을 했지만 아들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장면 2> 지난 8월 17일 최태원 SK 회장은 계열사 CEO들이 모인 확대경영회의에서 46조원가량의 투자계획을 결정했다. SK하이닉스의 반도체 라인을 증설하는 데 대략 15조원이 소요되는데, 그런 라인을 3개 증설한다는 것이다. 대다수 언론은 이것이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과 회사자금 465억원 횡령 사건 등 두 차례 회사 경영과 관련한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 특별사면과 복권을 해준 데 대한 보답으로 분석했다.

롯데그룹이 후계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는 가운데 8월 3일 일본에 체류 중이던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3일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해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 강윤중 기자

롯데그룹이 후계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는 가운데 8월 3일 일본에 체류 중이던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3일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해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 강윤중 기자

SK 최 회장의 ‘통 큰 투자’는 괜찮나
이 두 사건을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는 매우 상반됐다. 롯데 사건에 대해서는 총수의 전횡과 전근대적인 지배구조가 주로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재벌 총수가 ‘손가락 지적’으로 이사 목숨을 맘대로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그 다음날 신 회장이 이사회를 정식으로 소집해서 아버지를 해임한 것은 비록 그것이 ‘패륜’의 뉘앙스는 있었지만 적법성의 이미지만큼은 크게 어필했다.

SK 최 회장의 행보에 대한 언론의 반응은 대체로 용비어천가 일색이다. 특별사면에 대한 문제제기가 일부 있었지만 46조원의 ‘통 큰 투자’ 계획을 발표한 데에는 딱히 비판이 없었다. 오히려 연일 경영일선에서 강행군을 하는 부지런한 일꾼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이 두 장면은 모두 우리나라 재벌이 안고 있는 근본적 문제를 잘 보여주는 판박이 증거들이다. 그런데 우리 언론은 이 두 장면을 정반대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상식이 무너진 모습이 여기서도 또 보인다.

<장면 1>로 되돌아가 보자. 우리가 이 장면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뭘까? 사람을 잘라서? 남을 해고하는 것은 그 사람 인생이 달린 일인데, 그냥 총수가 이유 없이 잘라서? 그렇다면 그 다음날 아들이 아버지를 쫓아낸 것은 아름다운 일인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이틀 동안 일어난 일은 결국 사람 자르는 것이 핵심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첫째 날 일이 둘째 날 일보다 더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우리가 첫째 날의 상황에 더 개탄하는 이유는 ‘과정과 절차’ 때문이다. 이사회를 제대로 개최해서 정식으로 의결하지 않은 채 이사 해임과 같은 중요한 일을 손가락질로 처리했다는 데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다. 똑같이 사람을 잘라도 이사회를 소집해서 절차를 갖추어 자른 아들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형이 며칠 뒤 반격을 하기 위해 아버지가 서명한 ‘지시서’를 공개한 후 오히려 여론의 역풍을 맞은 것도 손가락질이 종이쪽지로 대체됐을 뿐 이사회의 의사결정구조를 무시하고 총수가 독단적으로 전횡한다는 측면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8월 14일 새벽 ‘광복절 특사’로 특별사면돼 경기 의정부교도소를 나서고 있다. / 정지윤 기자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8월 14일 새벽 ‘광복절 특사’로 특별사면돼 경기 의정부교도소를 나서고 있다. / 정지윤 기자

그렇다면 <장면 2>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사회의 의사결정구조를 존중해서 중요한 결정을 한 것으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총수의 전횡이라고 봐야 하는가? 조금 모호하다. 일단 계열사 CEO를 불러 모아서 확대경영회의를 주재했기 때문에 최 회장이 손가락질이나 종이쪽지로 지시한 모양새는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각 계열사 CEO들이 자기 회사의 이사회를 소집해서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증거도 없다. 광복절 연휴 동안에 이사회가 열렸는지는 보도되지 않았으나, 적어도 투자 집행의 당사자인 SK하이닉스 차원에서 어떤 형태의 공시나 보도자료도 나온 것이 없다.

혹자는 “SK가 지주회사 체제니까 총수가 결정해도 상관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주회사가 SK텔레콤을 통해 가지고 있는 하이닉스 지분은 공정거래법상 상장 자회사 주식 소유한도를 가까스로 넘긴 20.07%에 불과하다. 외부 주주 비중이 대략 80%이고, 국민연금이 9% 넘게 가진 2대 주주다. 그런데 총수가 맘대로 이런 결정을 내려도 되는가?

‘허수아비 이사회’ 재벌은 다 똑같아
금액이 적다면 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15조원짜리 생산라인 3개를 증설한다는 결정은 절대로 작은 액수가 아니다. SK하이닉스의 총자본금은 연결 기준으로 약 20조원 정도이고, 총자산도 약 28조원 정도이다. 46조원의 돈은 총자산의 200%, 자기자본의 230%에 달하는 막대한 투자규모다. 반도체산업이 아무리 장치산업이라고 해도 이사회 결정 없이 누구나 ‘유행가 부르듯’ 맘대로 말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니다. 이사회조차도 주말에 뚝딱 열어 의결할 수 없고, 수많은 회의와 외부 자문을 거쳐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사안이다. 그런데 총수가 (혹은 총수가 참여한 계열사 확대경영회의가) 이것을 뚝딱 결정한 것이다. 이것은 이사회라는 의사결정구조를 무시한 점에서 신격호 총괄회장의 ‘손가락 지적’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결론은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이나 최태원 SK 회장이나 계열사의 이사회를 허수아비로 본다는 점에서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 신동빈 롯데 회장은 어떨까? 이사회를 통해 역전에 성공하고 최근의 롯데홀딩스 주주총회에서 이를 검증받았으니 진정으로 법을 지키는 ‘신세대 회장님’일까? 다음 장면을 보면 그 씁쓸한 답이 나와 있다.

<장면 3> 신동빈 롯데 회장은 지난 11일 호텔롯데에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순환출자 고리를 80%가량 해소하고 호텔롯데를 상장시키는 등 일련의 지배구조 개혁조치를 발표했다. 그러나 정작 회사 주식을 상장시킬지 여부를 결정할 상법상 권한을 가진 호텔롯데 이사회가 이런 결정을 사전에 의결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손가락 지적’은 아니지만 ‘회장님 발표’가 개별 회사 이사회의 결정보다 더 우선한다는 문제점은 여기서도 드러났다. 재벌은 다 똑같은 것이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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