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기 훼손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주로 법조담당으로 일하다가 일본 헌법을 공부하러 일본에 머물렀었다. 여러 지역의 재판소를 오가면서 불편했던 것은 재판소 한가운데 걸린 일장기였다. 서울은 물론 전국의 어느 법원에서도 태극기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본 재판관들에게 말했다. “사법기관인 재판소에 국기가 있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국가를 상대로 하는 소송도 많은데 재판소가 국기를 달면 곤란하지 않으냐.” 재판관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서 보니 법원 앞 마당은 물론이고 법정에도 태극기가 빠짐없이 있었다. 10년 가까이 법원을 드나들면서도 착각한 이유는 태극기가 공기·물처럼 자연스러웠거나, 일장기가 일상에 등장한 것이 어색해서였을 테다.

일본은 최근까지 국기와 국가가 없었다. 1999년 8월 13일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이 생기면서 히노마루와 기미가요가 국기·국가가 됐다. 하지만 국가를 가르치거나 국기를 걸지 않는 지역도 적지 않다고 한다. 특히 원자폭탄의 피해를 입은 히로시마에서는 국기·국가가 없는 평화교육을 한다. 미국에서는 성조기를 불태워도 표현의 자유에 포함된다는 연방대법원 판결이 있다. 1984년 조지 존슨이 레이건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의미로 공화당 전당대회장 근처에서 국기를 불태웠다가 기소됐다. 하지만 연방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사회를 부정하거나 공격적이라는 이유만으로 표현을 금지하는 것은 수정헌법 1조에 어긋난다”고 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경향신문 자료사진

자국의 국기를 훼손한다고 처벌하는 곳은 널리 알려진 나라 가운데는 거의 없다. 일본과 독일은 다른 나라의 국기를 훼손하면 처벌하지만 자국 국기는 상관없다. 특이하게 프랑스가 자국 국기 훼손도 처벌하지만 공공기관의 국기뿐이다. 집에서 들고 나와서는 무얼 해도 괜찮다. 우리나라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형법 105조에 따라 우리나라 국기를 훼손하면 징역 5년까지다. 106조에 따라 국기를 욕되게만 해도 징역 1년까지다. 오히려 109조를 보면 외국 국기 훼손은 벌이 작아서 징역 2년까지다. 얼마 전에 세월호 집회에서 태극기를 불태웠다는 이유로 20대 청년에 대해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됐다. 그 청년이 영장을 청구한 검찰과 이를 기각한 법원의 태극기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이범준 기자 seirots@kyunghyang.com>

주간여적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