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대통령의 수첩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수첩만 입수하면 특종인데….” 기자들은 농담 삼아 말했다. 수첩에 내 이름이 있을까. 대통령 인수위 시절 선거 때 이런저런 공을 세웠던 인사들은 초조해했다. 자신의 이름이 대통령의 수첩에 적혀 있기를, 그리고 호명되어 청와대로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랐다.
대통령의 수첩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다들 대통령에게 수첩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상상했다. 수첩에는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어떤 이름은 한국 사회의 상식을 넘어선다. 또 어떤 이름은 현재라는 시간을 거스른다.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수첩이지만, 수첩은 대통령 집무실 서랍 깊숙한 곳에 꼭꼭 숨겨져 있을 것만 같았다. 수첩은 거기 있어야만 했다. 인간은 이유를 알고 싶어하는 존재다. 이유를 알 수 없을 때 인간은 불안해진다. 윤창중, 문창극, 윤진숙…. 한국 사회의 상식을 넘어선 막말, 극우 편향적인 칼럼, 다짜고짜 밀어붙인 ‘진흙 속의 진주’. 자신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 도대체 이들을 왜 임명했는지 그 이유를 도저히 찾아낼 수 없을 때 ‘멘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수첩에라도 기대야 했다. “뭐, 수첩에 적혀 있대.” 수첩에 적힐 만한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고 믿었다. 수첩은 박근혜 대통령 막장 인사의 최소한의 알리바이였던 셈이다.
집권 3년차, 대통령의 수첩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더는 없다. 수첩에 어떤 이름이 적혀 있는지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수첩에 빈 페이지만 남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수첩에는 상식 밖의 이름도, 시대착오적인 이름조차도 남아 있지 않다. 세월호 참사로 사의를 표명한 정홍원 총리가 유임됐다. 현직 국정원장이 비서실장으로 임명됐다. 수첩 속 막장인사마저 지속불가능함을 보여준다. 이완구 총리가 성완종 리스트로 사의를 표명한 지 한 달을 향해가고 있다. 대통령이 이 전 총리의 사의를 받아들인 지 20일이 다 되고 있다. 또 총리는 공석이 됐지만, 누가 되든 관심 없다는 분위기다. “수첩에 적혀 있대’라는 최소한의 설명조차 기대할 수 없는 게 박근혜 정부 인사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