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한때 대통령의 수첩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수첩만 입수하면 특종인데….” 기자들은 농담 삼아 말했다. 수첩에 내 이름이 있을까. 대통령 인수위 시절 선거 때 이런저런 공을 세웠던 인사들은 초조해했다. 자신의 이름이 대통령의 수첩에 적혀 있기를, 그리고 호명되어 청와대로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랐다.

대통령의 수첩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다들 대통령에게 수첩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상상했다. 수첩에는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어떤 이름은 한국 사회의 상식을 넘어선다. 또 어떤 이름은 현재라는 시간을 거스른다.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수첩이지만, 수첩은 대통령 집무실 서랍 깊숙한 곳에 꼭꼭 숨겨져 있을 것만 같았다. 수첩은 거기 있어야만 했다. 인간은 이유를 알고 싶어하는 존재다. 이유를 알 수 없을 때 인간은 불안해진다. 윤창중, 문창극, 윤진숙…. 한국 사회의 상식을 넘어선 막말, 극우 편향적인 칼럼, 다짜고짜 밀어붙인 ‘진흙 속의 진주’. 자신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 도대체 이들을 왜 임명했는지 그 이유를 도저히 찾아낼 수 없을 때 ‘멘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수첩에라도 기대야 했다. “뭐, 수첩에 적혀 있대.” 수첩에 적힐 만한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고 믿었다. 수첩은 박근혜 대통령 막장 인사의 최소한의 알리바이였던 셈이다.

[주간여적]빈 수첩

집권 3년차, 대통령의 수첩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더는 없다. 수첩에 어떤 이름이 적혀 있는지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수첩에 빈 페이지만 남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수첩에는 상식 밖의 이름도, 시대착오적인 이름조차도 남아 있지 않다. 세월호 참사로 사의를 표명한 정홍원 총리가 유임됐다. 현직 국정원장이 비서실장으로 임명됐다. 수첩 속 막장인사마저 지속불가능함을 보여준다. 이완구 총리가 성완종 리스트로 사의를 표명한 지 한 달을 향해가고 있다. 대통령이 이 전 총리의 사의를 받아들인 지 20일이 다 되고 있다. 또 총리는 공석이 됐지만, 누가 되든 관심 없다는 분위기다. “수첩에 적혀 있대’라는 최소한의 설명조차 기대할 수 없는 게 박근혜 정부 인사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주간여적바로가기

이미지